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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레오퐁 &#187; Story of Sit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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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Pop+Kitecture(Pop+Architecture) Magazine 팝키텍쳐 매거진</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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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792년, 저는 수원 화성 건설을 계획했습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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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9 Oct 2011 04:30:02 +0000</pubDate>
		<dc:creator>이 지은</dc:creator>
				<category><![CDATA[Story of Site]]></category>
		<category><![CDATA[수원]]></category>
		<category><![CDATA[정약용]]></category>
		<category><![CDATA[화성]]></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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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수원천은 화홍문을 통해 화성 내부로 흘러 들어간다. 오른쪽 위로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제 이름은 정약용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다산(茶山)’이라고도 부르지요. 한꺼번에 8가지 정도의 일을 해서 그런지 책도 많이 쓰게 되고 또 사람들에게도 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모양입니다. 뒤를 돌아보니 제 인생,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요. 하지만 인생의 황혼인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수원 화성(華城). 버들가지와 꽃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1-tm.jpg" alt="1792_01.jpg" width="750" height="498" /></a><br />
<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수원천은 화홍문을 통해 화성 내부로 흘러 들어간다. 오른쪽 위로 방화수류정이 보인다]</span></p>
<p>제 이름은 정약용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다산(茶山)’이라고도 부르지요.</p>
<p>한꺼번에 8가지 정도의 일을 해서 그런지 책도 많이 쓰게 되고 또 사람들에게도 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모양입니다.<br />
뒤를 돌아보니 제 인생,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요. 하지만 인생의 황혼인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p>
<p>수원 화성(華城).<br />
버들가지와 꽃이 흩날리던 방화수류정.<br />
장용영 군사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던 화성행궁.<br />
팔달단 정상에서 화성을 바라보시던 금상(今上:임금)의 미소..</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2.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2-tm.jpg" alt="1792_02.jpg" width="750" height="498" /></a><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화성행궁. 행궁은 도성 밖에 있는 임금의 임시 궁궐을 말한다. 온양행궁, 남한산성행궁등이 있었다.]</span></p>
<p>그 아름다운 곳에 제가 쏟아 부었던 땀과 그 많은 불면의 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p>
<p>1792년 겨울 저는 아버님 상중으로 한양을 떠나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 해 추운 어느날 금상께서 저에게 아주 희한한 일을 맡기셨습니다.<br />
홍문관의 직위를 가지고 있어도 모든 공무는 포기한 채 부모상을 지켜야 하는데, 그런 저에게 말씀 하실 정도니 꽤나 중요한 업무였지요.<br />
갓 30살을 넘긴 저에게 금상은 ‘새로운 도시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br />
허허….새로운 도시를 만들라니요. 그것이 그렇게 쉽게 만들어집니까.<br />
저의 당혹스러운 모습에 금상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p>
<p>“나는 이 새로운 도시가 백성들이 안전하게 잘 살수 있는 곳이 되길 바란다. 그것은 예전의 고루한 방식이 아닌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으로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대 가슴에 품어왔던 ‘그것’을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어떤가..”</p>
<p>성리학만이 아닌, 실학과 같은 폭넓은 학문을 통해 혁신적인 조선을 꿈꾸었던 저의 속마음을 금상은 알고 계셨고, 또 그 마음을 펼쳐 보라고 하신 겁니다.<br />
네…저에게 기회가 온 것입니다. ‘조부모상을 3년으로 하는 것이 맞는지, 5년으로 하는 것이 맞는지’로 온 나라가 싸우는 이 때, 전 그 기회를 반드시 잡기로 결심했지요.</p>
<p>저는 새로운 도시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안전이라고 생각했고 바로 조선에 가장 적합한 성곽을 계획했습니다. 물론 얼마 전 한강에 배로 다리를 만들어 본 경험은 있었지만, 성곽은 정말 큰 공사 아니겠습니까. 저는 먼저 조선의 성곽을 연구 한 후 조선에서 한번도 만들어 본적이 없는 새로운 성곽을 만들기로 했습니다.<br />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조선성곽의 문제점을 들어 유성룡이 제안한 『성설』, 중국 명나라 때 윤경의 『보약』등의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 한 후, 저만의 방식으로 다시 정리했습니다.<br />
제가 여러 종류의 학문에 대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저만의 ‘크게 분류하기’방식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지요.<br />
먼저 일곱 가지로 성곽 계획의 틀을 잡았습니다. 분류, 재료, 호참(성곽 둘레의 참호), 축기(터쌓기),벌석(돌 다듬기), 치도(도로), 조차(수레제작), 성제(성을 쌓는 법)외에 특히,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이제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거중기와 큰 돌을 손쉽게 운반하는 수레를 만들었지요. 유형거(遊衡車)는 바퀴가 아주 튼튼하고 경사지도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br />
얼마나 잘 만들었냐고 물으셨습니까?<br />
흠….예를 들자면, 이전의 수레 100대로 324일 걸려 운반할 짐을 유형거 70대로 154일만에 운반이 가능합니다.<br />
또한 거중기는 한 사람당 400근(약 240kg)을 들어 올릴 수 있어 공사기간을 빠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요. 금상께서도 이것으로 4만 냥 이상의 비용을 절약했다고 기뻐하셨습니다.</p>
<p>저는 화성의 전체 범위를 정하는 것이 모든 계획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략의 길이를 3,600보(약 4.24km)로 높이를 2장5척(7.75m)로 정했고 거기에 맞춰 석재, 기술자, 인부, 비용을 산출했습니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3.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3-tm.jpg" alt="1792_03.jpg" width="750" height="498" /></a><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서쪽의 서장대와 장안문을 이어주는 석축]</span></p>
<p>성곽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석재의 경우 가까운 곳에 석재 채취장을 찾아 운반 비용을 최소화 했고, 석재의 크기를 용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한 수레에 싣는 숫자를 일정하게 했습니다. 그래야 전체 수요량에 맞춰 계산 할 수가 있지요. 물론 이런 방식을 제가 완전히 새로 고안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확한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맞춰 일을 진행하는 것이 불필요한 비용과 시간의 낭비를 막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제가 추구하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이기 때문에 이번 화성에서 그 목적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p>
<p><img style="float: left; margin-top: 5px; margin-right: 20px;"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4.jpg" alt="1792_04.jpg" width="485" height="397" /> <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 width: 505px; float: left; margin-bottom: 10px;">[성문을 보호하는 반원모양의 옹성]</span> 화성 성곽은 예전 우리 조상이 도성을 만든 성곽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예전엔 마을을 둘러 쌓고 있는 성, 즉 도성(都城)이 있었고 전쟁 시에 피난을 가서 몸을 숨기는 산성(山城)이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성을 두 종류로 만들어야 하고 또 관리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화성은 그 두 가지의 성을 합친 ‘방어와 공격이 가능한’ 성곽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br />
전쟁이 나서 화성 바깥으로 도망가지 않아도 우리 백성들을 지킬 수 있도록 말이죠. 화성은 그런 이유로 몇 가지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옹성(甕城)과 현안(懸眼)이 그것입니다.<br />
옹성은 성문 밖에 반원형 등의 형태로 한번 더 쌓은 성을 말합니다.</p>
<p>성문을 보호하는 기능 외에 전면으로 돌출되어 있어 다른 방향에서 성곽을 기어 오르는 적을 차단할 수 있게 했습니다. 중국에서 사용하던 방식인데, 임진왜란 후 유성룡의 제안으로 알려졌으나 조선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은 방식이었습니다. 화성의 네 군데 성문에 모두 옹성을 두어 화재로부터 성문을 보호하도록 했습니다.<br />
현안의 경우 성벽을 일정하게 뚫어 외부의 적을 감시하고 활을 쏘는 용도였으나 저는 조금 변형을 했습니다. 벽의 구멍을 45도 각도로 아래로 뚫어 성벽에 근접한 병사도 동시에 감시하고 뜨거운 물을 끼얹어 적을 물리치도록 했지요.</p>
<p>아..저는 그때 정말로 행복했습니다.<br />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같은 이용후생학자들의 글을 읽으며 현실적인 조선의 개혁을 꿈꾸던 제가 그 꿈을 화성에서 실현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br />
물론 금상이 아니셨다면 그런 저의 꿈들도 그저 ‘기이한 선비의 글장난’으로 끝났을테지요.</p>
<p>화성(華城)…..<br />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제 꿈이자 금상이 꿈꾸시던 이상의 공간입니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dasan.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dasan-tm.jpg" alt="dasan.jpg" width="750" height="694" /></a></p>
<p style="color: #808080;">일러스트레이션 : 금민</p>
<div style="font-size: 8.5pt; padding-top: 15px; color: #824008;">참고문헌 :<br />
정약용, 『여유당 전서』<br />
『정조실록』<br />
최홍규,『정조의 화성 건설』<br />
최홍규,『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br />
유봉학 외,『정조시대 화성 신도시 건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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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title>
		<link>http://leopon.co.kr/miew1351/2011/1985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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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3 Aug 2011 03:16:15 +0000</pubDate>
		<dc:creator>이 지은</dc:creator>
				<category><![CDATA[Story of Site]]></category>
		<category><![CDATA[궁궐]]></category>
		<category><![CDATA[수원]]></category>
		<category><![CDATA[역사]]></category>
		<category><![CDATA[정조]]></category>
		<category><![CDATA[조선]]></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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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예지야.. 환경전 왼쪽에 있는 건물로 가볼까? 소현세자가 돌아가신 후 약 100년 후에 조선의 희망이 바로 여기 경춘전에서 태어났어. 어릴 적 시련을 극복하고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해서 조선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왕이 태어난거야. 이분이 경춘전에서 태어났을 때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꿨던 아버지가 너무 기뻐 그림으로 그려 걸었을 정도였지. [정조가 태어났던 경춘전. 오른쪽으로 소현세자의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blockquote><p>예지야.. 환경전 왼쪽에 있는 건물로 가볼까?</p>
<p>소현세자가 돌아가신 후 약 100년 후에 조선의 희망이 바로 여기 경춘전에서 태어났어.</p>
<p>어릴 적 시련을 극복하고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해서 조선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왕이 태어난거야. 이분이 경춘전에서 태어났을 때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꿨던 아버지가 너무 기뻐 그림으로 그려 걸었을 정도였지.</p></blockquote>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4.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4-tm.jpg" alt="jungjo04.jpg" width="750" height="498" /></a></p>
<p><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정조가 태어났던 경춘전. 오른쪽으로 소현세자의 독살설이 나왔던 환경전이 보인다]</span></p>
<p>정조대왕(1752~1800) 조선 제22대왕.</p>
<p>할아버지 영조에 이어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를 만든 임금으로 서얼등용, 금난전권 폐지 등을 통해 이전의 군주가 보여주지 못했던 백성 중심의 정치와 강력한 왕권강화를 이루었는데 창경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문정전 앞에서 발생한 일대의 사건은 정조의 트라우마이면서 동시에 그가 이룬 업적의 배경으로 이해되기도 한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5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5-tm.jpg" alt="jungjo05.jpg" width="750" height="408" /></a></p>
<p><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창경궁의 편전, 즉 임금의 일상 업무를 보던 문정전. 영조의 첫번째 부인인 정성왕후의 혼전으로도 사용되었다]</span></p>
<p>1762년 윤5월 13일 영조는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문정전 앞으로 끌어내어 세자 자질을 이유로 자결을 명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목숨까지 포기하도록 한 이 사건 뒤에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차이와 노론과 소론 사이의 정치적 차이가 숨어있었다.</p>
<p>4살 때부터 사도세자를 성균관에 입교 시키며 혹독하리만치 철저하게 제왕교육을 시킨 영조는 자신의 기대치만큼 크지 못하는 아들에 대해 실망하기 시작했다. 실망감을 감추는 대신 아버지는 더욱 더 아들을 책망하며 그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세자 또한 부왕에게 반발하기 시작했는데, 주색에 빠지고 궁녀를 죽이는 등 그의 비행은 온 도성 안의 화제였다.</p>
<p>한때는 문무에 출중하고 명석한 두뇌(15세에 벌써 아버지를 대신해 대리청정까지 했다)와 무사적 기질을 보였던(효종이 사용하던 청룡도가 매우 무거워 무예의 고수들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는데, 사도세자는 15~16세부터 이 청룡도를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신체조건과 무예에 능했다)사도세자는 이렇게 궁궐 안의 문젯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p>
<p>영조의 지지세력인 노론은 이때다 싶어 사도세자의 지지세력인 소론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도세자의 기행을 영조에게 고하기 시작했다.</p>
<p>1762년(영조 38) 5월 22일 노론파인 나경언의 고변서를 통해 사도세자의 비행이 정식으로 영조에게 알려졌다. 아들에 대한 처리문제에 고심하던 영조는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로부터 세자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고 아들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p>
<p>자신을 낳아준 생모에게서도 내침을 받은 세자는 자결을 하려 하였으나, 주변 소론세력의 저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른 영조는 문정전 앞뜰로 뒤주를 가져오게 한 뒤, 아들을 밀어 넣고 자신이 직접 못을 박고 자물쇠를 달았다고 한다.</p>
<p>￼</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3.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3-tm.jpg" alt="jungjo03.jpg" width="750" height="498" /></a><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수원 화성행궁에 복원된 뒤주. 뒤주는 예전에 쌀을 보관하던 나무통을 말한다]</span></p>
<p>이때 11살 원손(왕세자의 맏아들)이였던 정조는 뒤주 앞으로 달려 나와 할아버지에게 애걸하였다.</p>
<p>“아버지를 살려 주십시오!”</p>
<p>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4학년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죽는 것을, 그것도 자신이 존경하는 할아버지에 의해 살해 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셈인데, 인생이 완전히 뒤틀리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영조는 이어 왕세손인 정조를 바로 왕세자로 책봉하고 일종의 협상을 하게 된다.</p>
<p>“네 아비의 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하면 안된다. 이 일에 가담했던 사람들조차 언급하지 말거라. 나에게 그걸 약속해 다오.”</p>
<p>14년 후 왕이 되기까지 정조는 매일 매일 조용히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한숨짓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모습에서, 사도세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 하는 할아버지 영조의 모습에서, 아버지를 죽이라고 소리치던 노론세력의 모습에서 말이다.</p>
<p>1776년 3월 10일, 경희궁에서 즉위한 첫날 모든 대신들은 긴장하면서 왕의 첫마디를 기다렸다.</p>
<p>“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실록. 정조1년&lt;1776&gt; 3월 10일)</p>
<blockquote><p>예지야…</p>
<p>아마 엄청난 충격이었을꺼야. 사도세자의 뒤주 사건 이후 그에 대한 모든 얘기는 금기가 되었거든. 그런데 그 얘기를 아들이 즉위 첫날 처음으로 언급한거야.</p>
<p>정조 임금님이 그 이후 어떤 왕이 되었는지 궁금하지?</p>
<p>이제는 창덕궁 후원 가볼까…?</p>
<p>많은 사람들이 비원이라고 하는데, 비원은 후원을 관리하던 기관의 이름이자, ‘비밀의 정원’이라는 의미로 일제 강점기때 잠시 붙여진 이름이기도 했으니까 이제는 정확한 이름인 후원이나 금원이라고 불러야 해.</p></blockquote>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6.jpg"><img style="margin-right: 2px;"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6-tm.jpg" alt="jungjo06.jpg" width="374" height="562" /></a><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7.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7-tm.jpg" alt="jungjo07.jpg" width="374" height="562" /></a></p>
<p><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왼쪽 - 후원에 있는 관람지와 관람정, 오른쪽 - 옥류천]</span></p>
<blockquote><p>후원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인 부용지 위에 보이는 건물은 주합루이자 규장각이야. 1층이 왕실 도서를 모아둔 규장각이고 2층은 열람실로 주합루라고 부르는데, 요즘에 전체 건물을 주합루라고 부른단다.</p></blockquote>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1-tm.jpg" alt="jungjo01.jpg" width="750" height="502" /></a></p>
<p><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창덕궁 후원에 있는 주합루. 바로 앞에 큰 문에는 임금이 양쪽의 작은 문에는 신하가 출입하였다.]</span></p>
<p>정조의 업적의 대부분은 인본주의적 왕권강화와 관련되어 있다. 영조시절부터 특정 정치세력에게 힘이 독점되는 것을 막기 위한 탕평책이 실시되었고, 정조는 이것을 이어 받아 서얼에게도 탕평책을 쓰게 되었다. 서얼이란 본 부인이 아닌 첩의 자식으로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살아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없어 능력이 있어도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가던 그들을 과감히 등용하여 규장각에서 일하게 한 것이다. 원래 왕실의 도서를 관리하고 선왕의 글을 정리하는 기관이었던 규장각은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그 시대 최고의 두뇌가 모였던, 일종의 ‘씽크탱크’ 역할을 했다.</p>
<p>또한 종로의 육의전과 시전 상인이 가지고 있었던 금난전권(상권을 독점하기 위해 정부와 결탁하여 개인의 상업권을 금지했던 권리)을 폐지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육의전 물품을 제외한 모든 물품에 대해서 누구라도 팔 수 있다는 권리를 인정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18세기 세계는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상업의 가치와 자유경제에 대한 백성들의 요구를 국가가 들어줬다는 것이다. 백성의 아비로서 군림하는 것이 아닌, 백성의 소리를 들어주는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p>
<p>실제로 다른 왕과 달리 정조는 백성에게 공고하는 문서인 윤음(綸音)에 한글을 종종 사용했다. 어려운 한자보다 널리 알려진 쉬운 한글로 써서 많은 백성들이 직접 왕의 말을 알 수 있도록 했다.</p>
<p>조선의 27대 왕 중 유일하게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를 남겼을 정도로 학자형 군주였던 정조는 단순히 글만 읽는 왕이 아니였다.</p>
<p>조선 시대 건축과 도시계획사에 큰 획을 그은 최대의 신도시 프로젝트를 진행 했다.</p>
<p>‘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는 평을 받는 수원 화성을 건설한 것이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2.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2-tm.jpg" alt="jungjo02.jpg" width="750" height="498" /></a></p>
<p><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화성을 둘러싸고 있는 네 군데 큰 문중 하나인 화서문과 서북공심돈]</span></p>
<div style="font-size: 8.5pt; padding-top: 15px; color: #824008;">참고문헌 :『정조실록』</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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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창경궁에 숨겨진 비극.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title>
		<link>http://leopon.co.kr/miew1351/2011/1839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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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6 Jul 2011 01:51:41 +0000</pubDate>
		<dc:creator>이 지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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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궁궐]]></category>
		<category><![CDATA[역사]]></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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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여기 창경궁에서 있었던 큰 사건중에 하나가 소현세자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데 환경전은 대장금이 어의로 있었던 중종 임금님이 승하하셨던 곳이지만, 또한 소현세자가 독살 당한 장소로-아직도 정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class="tweet_said" style="line-height:1.5em;">
<p>예지야, 이모랑 창경궁 가자.<br />
응…? 아..알아…궁궐 재미없지?<br />
비슷비슷한 건물에 공포, 상량, 팔작지붕..왠 어려운 말만 잔뜩 써놓고.<br />
결정적으로 한문은 왜 그렇게 많은지&#8230;<br />
건물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고 또 아무것도 없는 마루, 온돌방을 무슨 재미로 보겠어.<br />
심지어 이모가 궁궐지킴이로 자원 봉사하는 창경궁은 그나마 남아 있는 건물도 거의 없으니&#8230;</p>
<p>대신 이모가 창경궁에서 만난 멋진 남자얘기 해줄께.<br />
똑똑하고 담대하고 마음이 열린 남자말야. 자기가 살던 조선 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넓은 세계를 이곳 한국으로 끌어 들이려고 했던 멋진 남자. (예지야…너도 커서 이런 멋진 남자 만나길 바래!)</p>
</div>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6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6-tm1.jpg" width="750" height="498" alt="sohyun06.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궐내각사(현대적 의미의 정부종합청사)에서 바라본 창경궁]</span></p>
<p>조선 16대 임금님인 인조의 첫번째 아들이면서, 17대 임금님인 효종의 큰형이였던 소현세자.<br />
한국에서 소현세자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제대로 임금님이 된적도 없이 그저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람이니까 말이다.<br />
여기 창경궁에서 있었던 큰 사건중에 하나가 소현세자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데 환경전은 대장금이 어의로 있었던 중종 임금님이 승하하셨던 곳이지만, 또한 소현세자가 독살 당한 장소로-아직도 정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4.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4-tm1.jpg" width="750" height="498" alt="sohyun04.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창경궁 안에 있는 환경전]</span></p>
<p>소현세자는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쟁한 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세자다. 항복의 몇 가지 조건 중 ‘왕의 장자를 청나라(정확히는 후금)로 보내 화친의 징표로 삼는다’ 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때 소현세자가 자원해서 중국 심양(지금의 선양)으로 가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한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길에 나와서 소현세자의 심양길을 울면서 배웅했다고 한다. 물론 다음 임금이 될 세자의 포로생활을 염려한 것 일 수도 있지만, 병자호란 이후 완전히 파괴된 자신들의 삶과 전쟁포로로 같이 끌려가는 친척, 가족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p>
<p>심양에서의 소현세자는 어떻게 살았을까?<br />
운명을 탓하면서 글을 쓰거나, 술에 빠져 살았을까?<br />
소현세자를 조선의 큰 희망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심양에서의 그의 행동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행동했다. 포로로 끌려간 조선사람들은 대개 청나라 사람들의 노예로 일했는데, 조선으로 도망가다가 잡히면 발뒤꿈치의 뼈를 잘라내서 다시는 뛰지 못하도록 만들 정도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한 비참한 조선노예들의 실상을 본 소현세자는 그저 조용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청나라와의 끈질긴 협상으로 –협상이 안되면 돈으로 사서- 그들을 다시 조선으로 돌려 보냈다. 이런 소현세자 뒤에는 ‘조선 최초의 여성 CEO’라고 불리는 세자빈 강씨의 역할도 컸다. 중국과 조선 사이에서 무역을 하면서 돈을 모았고 이 돈으로 포로들를 사서 조선으로 돌려 보냈고, 심양 근처에 논밭을 사서 그곳에 거주하는 조선사람들이 농사를 짓게 했다. 처음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중국 심양에 도착했을 때 조용한 촌락이였던 심양이 상인들과 조선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또한 조선이 명나라를 이은 세계 최고의 나라고 조선을 침략한 말갈족(청나라)은 미개한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조선 임금과 선비들과 다를 바 없었던 그는 훨씬 현실적이고 과학기술이 뛰어난 청나라를 경험하고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런 청나라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한 동생인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달리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책과 천체 관측기구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담 샬이라는 독일 예수회 신부를 만나게 된다. 아담 샬은 중국에서 천체관측에 대한 책을 발간했고 소현세자와도 친해 로마 카톨릭과 유럽의 문물을 소개했다.<br />
소현세자는 9년간의 인질 생활 동안 조선과 청을 이어주는 외교관과 몽골어를 배우는 등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던 지식인이였다고 할 수 있다.</p>
<p>1645년 음력 2월, 소현세자는 자신이 배운 폭넓은 지식과 경험으로 조선을 크고 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큰 꿈을 품고 9년간의 길고 긴 포로 생활 끝에 귀국하게 된다.<br />
돌아온 첫날 그는 아버지인 인조 임금 앞에서 그의 꿈을 말하기 시작했다.<br />
‘청나라(후금)는 아주 발전된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청나라를 배워서 좀더 강하고 잘사는 조선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 보세요. 이 많은 책들과 천체기구들…’ 인조는 더 듣지도 않고 벼루를 들어 아들의 얼굴을 내려쳤다고 한다.<br />
그는 1637년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삼전도의 굴욕(삼배구고드례:청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항복절차)이라고 하는 치욕적인 사건을 겪어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다. 항복 이후 인조는 환경전 바로 뒤에 있는 침전 중 하나인 양화당에 칩거하며 청나라 사신이 오면 아프다는 이유로 누워서 사신을 접견하기도 했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5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5-tm1.jpg" width="750" height="498" alt="sohyun05.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인조가 병을 이유로 칩거하며 청나라 사신을 맞이했던 양화당]</span></p>
<p>많은 이들은 인조가 아들인 소현세자를 경쟁자로 봤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조선인 포로를 돌려보내준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조선 내에서도 소현세자의 인기가 꽤 높았던 그 시기에, 자기를 제치고 바로 왕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 ‘어떠한 조치’를 취했을 수도 있다.<br />
문제는 청나라에서 돌아오고 채 2개월도 지나지 않아 음력 4월 26일 소현세자가 급사하며 터졌다.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소현세자의 온몸이 새까맣게 변해 검은색 천을 얼굴에 갖다 대니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고, 온몸의 9개 구멍에서 피가 나온 흔적이 보인다’라고 증언했던 것이다(인조실록 23년 음력 6월 27일). 이후 소현세자의 독살설이 퍼졌고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p>
<p>소현세자 독살설 이면에 아버지인 인조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란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 근거한다. 첫번째는 소현세자에게 마지막으로 침을 놓은 어의 이형익을 인조가 그냥 살려줬다는 것이다. 학질에 걸렸다는 소현세자에게 인조는 어의인 이형익을 보냈고 그가 침을 놓은 후 사흘 만에 세자는 사망하였다. 왕위를 이을 세자가 그렇게 급사할 경우 어의들은 문책을 받아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도 있는데, 인조가 오히려 그를 두둔했다.<br />
두번째는, 소현세자의 사망 후에 인조가 그 가족들에게 했던 행동 때문이다. 소현세자의 부인인 세자빈 강씨는 임금님이 드실 전복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궁궐에서 쫓아냈다. (죄인인 경우 정문인 홍화문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서 바로 옆 선인문으로 나갔다. 사약을 받은 장희빈의 시신도 이 문을 통해서 나갔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3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3-tm.jpg" width="374" height="248" alt="sohyun03.jpg" style="margin-right:2px;" /></a><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2.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2-tm1.jpg" width="374" height="248" alt="sohyun02.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왼쪽 사진 :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 오른쪽 사진 : 장희빈 시신과 세자빈 강씨가 쫓겨 나간 선인문]</span></p>
<p>원래 세자가 죽으면 세자의 첫번째 아들이 이어서 세자가 되는데, 인조 임금님은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다음 세자로 책봉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모두 제주도로 귀양 보내 그 집안을 완전히 해체해 버렸다.</p>
<p>역사에 ‘~였다면?’은 결코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소현세자가 죽지 않고 임금님이 되었다면 지금 한국의 모습은 많이 달려지 않았을까? 효종 임금부터 조선은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고 조용히 지내기 시작했으니 그 대신 소현세자가 임금이 되어 조선의 문을 열고 새로운 사상과 기술을 받아들이고 세상과 교류했다면&#8230;?</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1-tm1.jpg" width="750" height="499" alt="sohyun01.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궁궐의 정전(가장 높은 지위의 건축물)중 가장 오래된 명정전(1616)과 신하들이 서있던 조정]</span></p>
<div class="tweet_said" style="line-height:1.5em;">
<p>이모는 소현세자 독살설을 알게 된 후 다시 환경전을 봤을 때 정말로 울컥했단다. 그 전에 봤을 때는 다른 곳과 같은 궁궐 건물인데, 여기에서 이모가 반한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환경전이 더 이상 평범한 궁궐 건물이 아니게 된거야.</p>
<p>아…예지야, 소현세자가 죽었다고 조선의 모든 희망이 사라진건 아니야. 약 100년 후에 또 하나의 희망이 창경궁에서 태어난단다. 그 이야기는 이 다음 건물에서 얘기해줄께.</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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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930 모던 경성, 그리고 우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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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5 May 2011 23:51:42 +0000</pubDate>
		<dc:creator>yeonkyung Lee</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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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930 모던 경성, 그리고 우리 - 너와 내가 걷는다. 2011년의 서울을, 그리고 1930년의 경성을 - 京城. 게이조. Keijo 낯설고도 멀게 느껴지는 서울의 또 다른 이름. 경성은 1910년 이후 일제 강점기의 서울을 일컫는 행정구역명이다. 일제는 1910년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명하고 경기도의 일부에 소속시켰으며, 우리식 발음인 ‘경성’보다 ‘게이조’라는 발음으로 우리의 서울을 불렀다. 해방 이후에야 ‘서울’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4/seoul1930.jpg" width="280" height="420" alt="seoul1930.jpg" style="float:right; margin-bottom:5px; margin-left:15px;" /></p>
<h2>1930 모던 경성, 그리고 우리<br />
<span style="font-size: 14px;color:#059AE7;">- 너와 내가 걷는다. 2011년의 서울을, 그리고 1930년의 경성을 -</span></h2>
<div style="height:30px"></div>
<h5>京城. 게이조. Keijo<br />
<span style="font-size: 13px;color:#999;">낯설고도 멀게 느껴지는 서울의 또 다른 이름.</span></h5>
<p>경성은 1910년 이후 일제 강점기의 서울을 일컫는 행정구역명이다. 일제는 1910년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명하고 경기도의 일부에 소속시켰으며, 우리식 발음인 ‘경성’보다 ‘게이조’라는 발음으로 우리의 서울을 불렀다.<br />
해방 이후에야 ‘서울’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그 이후 식민지 시대의 도시였던 경성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p>
<p>경성이 다시 우리에게 다가온 건 최근의 일인 듯 하다. ‘모던 보이’ ‘경성스캔들’ 등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가 나오며 우리는 ‘식민지권력과 일본’ 그 자체보다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아무리 슬픈 시대에도, 아무리 어려웠던 시대에도… 삶은 계속되었으며, 그 안의 삶은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소소하고도 아름다웠을 터이니 말이다.</p>
<p>2011년 3월 29일부터 6월 26일까지 청계천 문화관에서 열리는 ‘<a href="http://leopon.co.kr/leopon/2011/11898" target="_top">이방인의 순간포착, 1930 경성</a>’ 이라는 전시는 우리가 몰랐던 경성의 일상을 도면과 사진 자료와 같은 물리적이고도 건축적인(?) 자료들뿐만 아니라 당시의 노랫말과 사진엽서, 그리고 영상자료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방대한 자료를 구경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전시가 반갑지만,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조금씩 꺼내어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더욱 더 반갑게 여겨진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1-tm.jpg" width="750" height="261" alt="1930_01.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1929 요시다, 朝鮮博覽會圖繪: 전시장 입구의 대형 지도, 일본의 전통적인 지도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 지도에는 조선박람회장 내부뿐 아니라 경성의 주요 관람 포인트들을 잇는 관람동선과 각 포인트들의 모습등이 그려져 있다. 지도는 저 멀리 오사카, 동경까지 이어져 경성이 일본의 한 지방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span></p>
<p>전시는 크게 두 파트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파트는 1930년대 경성의 주요 장소들인 종로, 남대문로, 창경궁, 본정(혼마치, 本町) 등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두 번째 파트는 종로와 본정, 즉 조선인 거주지인 북촌의 중심 상업거리와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의 중심상업거리인 본정를 복원하는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819.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819-tm.jpg" width="374" height="249" alt="1930_0819.JPG" /></a><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85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851-tm.jpg" width="374" height="249" alt="1930_0851.JPG" style="margin-top:5px; margin-left:2px;"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경성의 주요 장소들을 보여주는 제 1전시장과 혼마치(本町)와 종로의 상점가 복원작업을 보여주는 제 2전시장]</span></p>
<p>1930년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1930년대는 189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화의 모습이 어느 정도 틀을 잡아간 시기이다. 이 시기는 경성이 가장 모던한 모습을 보여주는 시대로 평가되는데, 그 외관이 근대도시의 모습을 갖추었음을 물론이고, 그 안의 일상도 ‘모던화’ 되어버린 것을 발견할 수 있다.</p>
<p>경성거리에는 양복을 입고 단장을 짚고, 머리에는 중절모를 쓴 모던 보이들과 양산, 혹은 모자로 멋을 낸 양장의 모던 걸들이 넘쳐 났으며, 경성의 봄은 진달래, 개나리의 개화가 아닌 쇼윈도우의 스카프와 모자들에서 온다고 할 정도로 상업화가 진전되었다. 거리 곳곳의 레코드 가게에서는 유행가가 울려 퍼졌으며, 할 일 없는 유학파 청년들은 다방과 까페에 들어앉아 문학과 예술을 논하였다. 이상과 같은 룸펜과 이상의 절친한 친구인 박태원과 같은 만보객이 동시에 존재하였으며, 양복과 양장을 한 신세대들과 검정치마에 하얀저고리를 입은 구세대들이 동시에 존재하였던 풍경이 바로 1930년대의 모습이었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4.gif"><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4-tm.gif" width="251" height="350" alt="1930_04.gif" /></a><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5.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5-tm.jpg" width="266" height="350" alt="1930_05.jpg" /></a><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6.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6-tm.jpg" width="232" height="350" alt="1930_06.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좌): 나팔바지로 한껏 멋을 낸 모던보이들: img src: 안석영의 만문만화 (중): 19360601 동아일보 여름의 지나가는 거리, (우): 19340219 조선일보]</span></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road.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road-tm.jpg" width="375" height="372" alt="1930_road.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1930년대 경성의 주요 가로와 주요 장소들: 1939 경성 시가도 위에 표시]</span></p>
<h5>경성역과 미츠코시 백화점, 그리고 남대문로</h5>
<p>서울구경온 시골양반들과 교외에 놀러 나가는 서울내기들, 그리고 이리 저리 떠돌다 서울역 2층 까페에 자리 잡은 모던 보이들이 한데 섞여있는 경성역. 경성역을 나서면 남대문, 그리고 미츠코시백화점, 중앙우체국, 조선은행, 조지아 백화점, 식산은행 등 경성 시내 주요 근대시설들이 위치하여 있던 경성 최고의 근대적 가로경관을 보여주던 남대문로로 이어진다. 조선어와 일본어가 섞인 커다란 광고판과 현란한 네온사인, 전차와 버스, 자전거, 인력거가 지나는 소리들 등 근대 도시가 주는 스펙터클로 가득한 그 모습. 누군가는 그 스펙터클에 취해, 누군가는 식민지적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며 그 길을 걸었으리라. 시인 이상은 그 가로를 미츠코시 옥상에서 내려보며 ‘날자, 날자’를 외쳤을 것이고…</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7.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7-tm.jpg" width="750" height="476" alt="1930_07.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1925년 완공된 경성역의 모습]</span></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1-0076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1-0076-tm.jpg" width="750" height="478" alt="1930_01-0076.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남대문과 남대문로, 거리에 늘어선 상가들과 간판들]</span></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9.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09-tm.jpg" width="750" height="478" alt="1930_09.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1931년 완공된 미츠코시(삼월) 백화점]</span></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0.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0-tm.jpg" width="750" height="453" alt="1930_10.jpg" /></a><br />
<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미츠코시 백화점과 조선은행, 중앙우체국이 위치해 있던 선원전 광장]</span></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1-tm.jpg" width="750" height="443" alt="1930_11.jpg" /></a><br />
<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조선식산은행 등 주요 금융시설들이 분포해 있던 남대문로 1정목 (종로와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사이)]</span></p>
<p><iframe width="750" height="453" src="http://www.youtube.com/embed/uWiEfMP2mq4?rel=0"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p>
<h5>하쿠라이 舶来(はくらい) 문화의 메카, 본정</h5>
<p>중앙우체국 옆으로 난 좁다란 길을 들어서면, 남대문로처럼 쭉 뻗은 근대 가로는 아니지만, 내지보다 더 내지스러운 일본 문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본정거리가 나온다. 오사카, 동경 등에서 들어온 까페, 다방 문화는 물론이고 과자점, 모자점, 화장품점 등 온통 새롭고 진귀한 것들은 다 모인 듯 하다. 한 때 진고개라 불리며 사람들이 살지 않던 곳이 이렇게 모던 문화의 메카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1930년대 말까지 신문에 ‘당신은 쇼핑하러 본정으로 가십니까? 종로로 가십니까?’하며 비교 기사가 실릴 정도로 본정은 경성 최대의 번화한 상점거리였으며, 경성에 새로운 물건들과 문화를 전파해주던 곳이었다. 조선인들은 겉으로는 ‘종로’의 ‘조선’상점을 이용해야지 하면서도 ‘본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에 답답해하고, 또 실제로는 몰래 몰래 혼마치 상점가에 가서 쇼핑을 즐기곤 하였다곤 한다. (심지어 기모노까지 차려 입고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사실 이런 모습은 어렸을 때 ‘일본 싫어요’ 를 외치면서도 소니 워크맨은 놓지 못하던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2.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2-tm.jpg" width="750" height="465" alt="1930_12.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중앙우체국 옆 본정의 입구 (일본식 상점가 거리의 전형을 보여준다.)]</span></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3.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3-tm.jpg" width="750" height="470" alt="1930_13.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이 보이는 본정. 양 옆으로 늘어선 영란등은 혼마치 상점가를 밤에도 환히 밝혀주었다.]</span></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4.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4-tm.jpg" width="380" height="453" alt="1930_14.jpg" style="float:left; margin-right:5px;" /></a><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5-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5-1-tm.jpg" width="365" height="231" alt="1930_15-1.jpg" /></a><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5-2.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5-2-tm.jpg" width="365" height="220" alt="1930_15-2.jpg" style="margin-top:2px;"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19360104 조선일보 기사. 물건을 살 때 종로로 가십니까 본정으로 가십니까(왼쪽) |</span> <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9281231 동아일보 세말풍경 쓸쓸한 종로거리와 혼잡한 진고개거리(오른쪽) : (주: 진고개는 본정의 옛 이름이다.)]</span></p>
<h5>민족의 거리, 종로와 화신백화점</h5>
<p>남대문로와 종로가 만나는 종로 네거리는 그야말로 경성 시내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지나는 곳이었다. 종로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고, 종로 야시며 행상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새벽 4시나 되어서야 인적이 없어질 정도로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로 번잡하던 곳이었다. 종로는 한 때 모던의 꿈이 제일 먼저 펼쳐지던 중심지였으나 일제 치하로 들어가면서 모든 발전이 멈춰버리고 울분에 넘쳐나는 소리들만 넘쳐나다가 1926년 조선총독부의 이전을 계기로 뒤늦게 근대 가로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종로 상점가는 화폐개혁과 일본상권의 침입으로 인해 설 곳 없었던 조선 상인들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며 버텨나가던 곳이었는데, 1920년대 후반부터는 종로 상점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해, 대로변에는 화신백화점과 같은 민족 자본의 백화점도 들어서고, 시인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 제비와 같은 근대 유흥문화공간들도 들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인 가로들에 비해서는 발전이 더뎌지면서 뭔가 좀 덜 모던해 보이던 조선인들의 중심상업거리였으며, 종로 대로변의 화려한 건축물들의 위용과는 달리 뒷골목인 피맛골에는 사람 냄새나는 선술집들, 한식당들이 있어 가난한 조선인들이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내는 장소였다. 어떤 이는 종로에는 그 흔한 ‘레스토랑’ 하나 없다고 투덜대지만 이 곳은 조선 사람들의 ‘밥집’과 &#8216;술집&#8217;이 있던 부인할 수 없는 조선사람들의 동네였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6.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6-tm.jpg" width="750" height="483" alt="1930_16.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1930년대 종로 네거리의 모습. 화신백화점의 서관과 유창상회가 보인다. ]</span></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7.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7-tm.jpg" width="750" height="480" alt="1930_17.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1937년 완공된 화신백화점. 민족의 백화점이라는 선전문구를 내세웠던 화신백화점은 옥상정원과 엘리베이터는 물론 조선 최초로 에스컬레이터까지 갖춘 근대적인 백화점이었다.]</span></p>
<p><iframe width="750" height="453" src="http://www.youtube.com/embed/7OeiNuO_jRE?rel=0"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p>
<h5>밤의 유흥, 창경원 야앵과 종로 야시</h5>
<p>봄날 밤이면 야앵(夜櫻)을 나서고, 여름날 밤이면 종로 야시 구경을 나서던 경성 사람들. 한 때는 조선의 왕이 살던 궁궐이었으나, 창경원으로 격하되어버린 이후 경성 시민들에게 이 곳은 야앵, 밤의 벚꽃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 야앵을 나서는 사람들로 인해 종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전차 역시 만원. 야앵객들을 위해 우마차의 통행을 금지하는 등 교통 제한들도 만들어지는 등 야앵은 경성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봄날 밤에 누리고 싶은 유흥거리였던 듯 하다. (우리가 요즘 봄만 되면 여의도 벚꽃놀이에 환호하듯이 말이다.) 여름이 되면 많은 경성 사람들이 밤에 종로 거리로 나섰다고 하는데, 4월부터 9월까지 설치되었던 종로 야시는 그야말로 물건보다 사람이 더 많은 진풍경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싸구려’ ‘싸구려’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쓰리꾼들도 꽤나 많았던 것 같았지만, 더운 여름날 좁은 집안에서 버틸 수 없었던 경성 사람들에게 여름 밤 최고의 유흥거리였으리라.</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8.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8-tm.jpg" width="750" height="470" alt="1930_18.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벚꽃 가득한 창경원. 4월이면 야앵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전차로만 11만에 이르렀다고 하며, 시골에서도 야앵을 보러 상경을 하는 일까지 빈번히 일어날 정도로 야앵은 대표적인 경성의 밤의 유흥거리였다.)  (벚꽃 가득한 창경원. 4월이면 야앵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전차로만 11만에 이르렀다고 하며, 시골에서도 야앵을 보러 상경을 하는 일까지 빈번히 일어날 정도로 야앵은 대표적인 경성의 밤의 유흥거리였다.]</span></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9.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19-tm.jpg" width="750" height="467" alt="1930_19.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창경원 식물원. 이 건물은 아직도 창경궁 안에 있다.]</span></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20.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5/1930_20-tm.jpg" width="750" height="514" alt="1930_20.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line-height:1.5em;">[19300803 중외일보 번창하는 여름밤거리, 종로 야시]</span></p>
<h5>1930년대 경성, 그리고 지금</h5>
<p>전시에서는 이러한 1930년대 경성의 주요 장소들이 현재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일본인들의 거리였던 명동에 일본인 관광객이 몰려들고 일본어로 상품을 선전하는 풍경이 그들의 거리였던 혼마치거리와 중첩되며 묘한 감정을 만들어 내고, 지금은 박제가 되어버린 서울역의 모습이 당시의 ‘서울’의 꿈이 부푸는 장소로서의 경성역과 중첩되며 아련한 마음이 생긴다. 또한 우리들의 거리 종로의 옛 모습과 재개발로 블록 채 없어져버리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겹쳐지며 손끝으로 다시금 그 옛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p>
<p>1930년대 우리가 꾸던 모던의 꿈은 그 누군가에겐 좌절된 자주 근대화의 환영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식민지 도시의 못다한 꿈으로, 혹은 어떤 이에게는 그저 새롭고도 신기한 세상을 향한 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꿈은 오랜 시간 봉인을 뚫고 이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신기한 눈빛으로, 그리고 애달픈 마음으로 그 꿈을 바라보다 보니 1930년대의 경성이 그렇게 우리 앞을 지나간다.</p>
<table>
<tr>
<td style="width:35px; height:25px">
<object width="31" height="25"><param name="movie" value="http://www.youtube.com/v/zEdq-uUeO8A?fs=1&amp;hl=ko_KR&amp;autoplay=1" /><param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 /><param name="allowscriptaccess" value="always" /><embed src="http://www.youtube.com/v/zEdq-uUeO8A?fs=1&amp;hl=ko_KR;autoplay=1"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31" height="25"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br />
</object>
</td>
<td><span style="font-size: 10px; line-height: 100%;">BGM : </span><span style="font-size: 10px; font-style: italic;">이정숙 &#8211; 쟈라메라(일명:종로네거리.1928년.축음기 SP음반)</span><br />
<span style="font-size: 10px; line-height: 100%;">[ 음원출처: <a target="_blank" href="http://youtu.be/zEdq-uUeO8A">http://www.youtube.com/</a> ]</span>
</td>
</tr>
</table>
<div style="height:150px"></div>
<p><div class='postTabs_divs postTabs_curr_div' id='postTabs_0_12438'>
<span class='postTabs_titles'><b>1930 vs 2011 비교영상 - 서울역</b></span><br />
<iframe width="750" height="453" src="http://www.youtube.com/embed/8kdfzhtLs74" frameborder="0"></iframe><br />
</div>

<div class='postTabs_divs' id='postTabs_1_12438'>
<span class='postTabs_titles'><b>충무로</b></span><br />
<iframe width="750" height="453" src= "http://www.youtube.com/embed/-Yq07-6PwkI" frameborder= "0"></iframe><br />
</div>

<div class='postTabs_divs' id='postTabs_2_12438'>
<span class='postTabs_titles'><b>종로</b></span><br />
<iframe width="750" height="453" src="http://www.youtube.com/embed/eYu3jzZ0mco" frameborder="0"></iframe><br />
</div>

<div class='postTabs_divs' id='postTabs_3_12438'>
<span class='postTabs_titles'><b>서울전경</b></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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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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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성남시의 모라토리엄, 건축의 모라토리엄</title>
		<link>http://leopon.co.kr/leopon/2010/7813</link>
		<comments>http://leopon.co.kr/leopon/2010/7813#comments</comments>
		<pubDate>Mon, 06 Dec 2010 23:56:43 +0000</pubDate>
		<dc:creator>leopon9</dc:creator>
				<category><![CDATA[Story of Site]]></category>
		<category><![CDATA[건축가]]></category>
		<category><![CDATA[랜드마크]]></category>
		<category><![CDATA[설계]]></category>
		<category><![CDATA[성남]]></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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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얼마전 성남시의 모라토리움 선언과 함께 화제가 된 건물, 성남시청사. 2006년 9월 25일자 한국일보 송원영 기자의 &#8220;지자체 청사 신축 &#8216;뜨거운 감자&#8217;&#8221; 라는 기사에서는 새로운 청사 건립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신청사 건립에 필요한 자금 확보가 문제였고, 청사 이전에 대한 찬반이 뜨거웠음을 알 수 있다. 2006년 9월 26일 서울일보 윤상돈 기자의 &#8220;성남시 청사이전 &#8216;골머리&#8217;&#8221; 라는 기사를 보면, 구시가지 시민의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0/12/sungnam0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0/12/sungnam01-tm.jpg" width="750" height="562" alt="sungnam01.jpg" /></a></p>
<p>얼마전 성남시의 모라토리움 선언과 함께 화제가 된 건물, 성남시청사.</p>
<p>2006년 9월 25일자 한국일보 송원영 기자의 &#8220;지자체 청사 신축 &#8216;뜨거운 감자&#8217;&#8221; 라는 기사에서는 새로운 청사 건립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신청사 건립에 필요한 자금 확보가 문제였고, 청사 이전에 대한 찬반이 뜨거웠음을 알 수 있다. 2006년 9월 26일 서울일보 윤상돈 기자의 &#8220;성남시 청사이전 &#8216;골머리&#8217;&#8221; 라는 기사를 보면, 구시가지 시민의 단상 점거로 &#8216;시청사 이전계획 및 현청사 활용방안&#8217; 에 관한 공청회가 무산되고 이전 후보지의 보상문제까지 겹쳐 성남시 신청사 건립은 시작부터 문제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성남시는 9월 15일로 계획했던 공청회가 무산되자 성남시 홈페이지를 통해 기존 시청사의 활용방안을 접수하겠다며 보름간 배너창에 의견수렴 코너를 만들었다고 한다. 성남시 홈페이지의 공지사항 게시판에 &#8220;<a href="http://www.cans21.net/city_info/news/notice_view.asp?qField=subject&amp;qSearch=%C3%BB%BB%E7&amp;num=3354&amp;page=1" target="_blank">기존 시청사 활용방안에 관한 의견 수렴키로</a>&#8221; 라는 제목으로 &#8220;성남시는 지난 9월 15일 개최하고자 했던“현 청사 활용방안 수립” 공청회가 집단민원으로 인하여 개최하지 못함에 따라 10월16일부터 보름간 시 홈페이지를 이용하여 기존 시청사의 활용방안에 관한 시민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로 했다&#8230;&#8221; 라고 적고 있다.</p>
<p>성남시는 공청회가 무산된 바로 그 날 청사 이전에 관한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용지비용을 제외하고 1566억원을 들여 여수동 일대 국민임대주택단지 건설 예정지 안에 2만 2500평에 연면적 2만2천평 규모의 시청사를 짓기로 했다고 밝혔다. 2007년 1월 공사입찰과 설계를 거쳐 2007년 8월 착공하여 2010년 1월 완공.</p>
<p>이렇게 성남시의 신청사 건립 사업은 시작되었다.</p>
<p>2007년 10월 12일 한국일보 이범구 기자의 &#8220;성남시, 서울 시청보다 큰 청사 짓는다&#8221; 기사에서는 성남시의 신청사 건립이 과잉투자라고 지적하고 있다.</p>
<ul>
<li>&#8220;현대건설 컨소시엄이 제출한 기본설계설명에 따르면 새 청사는 지하 2층, 지상 9층(최고 높이 44.2m), 연면적 7만2,746㎡ 규모다. 이는 용인시청사(7만9,572㎡) 보다는 작지만 2010년 완공 예정인 서울시청사(7만2,450㎡) 보다 크다. 또 용인시청사가 시의회, 보건소, 문예회관, 복지관 등 복합시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성남시 새 청사가 사실상 최대규모인 셈이다.&#8221;</li>
</ul>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0/08/sungnam.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0/08/sungnam.jpg" width="750" height="409" alt="sungnam.jpg" /></a></p>
<p>재미있는 것은 호화청사를 비판하는 기사에서 신청사의 디자인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p>
<ul>
<li>&#8220;새 청사는 획일적인 관공서 형태에서 벗어나 넓게 펼쳐진 날개형태(스카이 윙)로 건립되며 외부 마감재를 컬러 복층유리와 알루미늄 패널, 무반사 지붕 패널로 사용해 현대적인 느낌을 한껏 강조했다&#8221;</li>
</ul>
<p>성남시의 신청사의 외관이 특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8216;스카이 윙&#8217; 이 어떤식으로든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결코 좋은 디자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성남시청사의 스카이 윙에 쓰인 컬러 복층유리와 알루미늄 패널은 일반적인 건축자재에 지나지 않는다. 성남시청사 디자인의 문제는 고가의 건축자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카이 윙이 청사 건축의 목적에 맞지도 않고 비를 가려주는 캐노피 역할조차 못하는 단순한 장식 구조물이라는 점에 있다. 최근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대부분의 건축물이 지나치게 형태와 규모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꼭 크게 지어야 랜드마크가 되는 것인지, &#8216;시민의 집&#8217; 에 날개까지 달아야 체면이 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컬러 복층유리와 알루미늄 패널이 고급자재도 아닐 뿐 더러, 비싼 재료를 썼다고 호화건물이라는 논리는 건축이나 디자인을 일차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루이비통 가방의 가치를 원단 값으로만 계산할 수 없는 것처럼 시청사 건물의 공간적인 성격에 맞는 입면과 마감 소재에 대해 입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p>
<p>2007년 11월 28일자 문화일보 김형운 기자의 &#8220;성남시 새청사 친환경 건물로&#8221; 에서는 성남시청사를 짓는데 에너지 효율을 고려해 친환경적인 기술이 적용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청사 지붕에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하고 지열에 빗물까지 활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건물 외관에 커튼월 유리를 쓰고 냉난방 효율을 올리기 위해 복층유리를 썼다고 한다. 건물 전면에 유리 커튼월로 세워 놓고 에너지 효율을 논한다는 건, 말 그대로 넌센스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피스 건물의 상당수가 유리 커튼월로 계획되고 있는데 낮에는 뜨겁고 눈부셔서 블라인드를 쳐야하고 겨울엔 성애 낀 창가에 전열기를 켜고 지내야 한다. 유리 커튼월은 열관리에 있어 가장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다. 콘크리트 외벽을 세우고 단열시스템을 고민했다면 청사 지붕에 태양열 집열판을 깔고 땅 속 깊이 코일을 심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스카이 윙과 유리 커튼월을 채택하고 태양열과 지열 시스템을 추가한다는 것은 투자 원칙 상 앞 뒤가 맞지 않는다. 밑빠진 독을 들여놓고 내부에 방수 처리 했다고 홍보하는 셈이니 말이다.</p>
<p>2010년 2월 11일 KBS 뉴스에서는 지자체의 &#8216;호화 청사&#8217; 경쟁에 따른 감사원의 특별감사를 보도하면서,</p>
<ul>
<li>&#8220;성남시장실은 정부의 권고 기준을 초과한 건 물론 경기도지사실보다도 커 펜트하우스냐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겉모습이 화려해야 일이 잘되는 건지, 신축 청사들의 겉모습은 천편일률적이고,<br />
  &lt;녹취&gt; 00구청 관계자(음성변조) : &#8220;건축이 유행이 있어요. 요새 다 유리건물 이잖아요.&#8221;<br />
  &lt;녹취&gt; 송영건(성남시 부시장) : &#8220;현재 공공건물도 디자인 측면에서 건축미를 살려서 갈 필요도 있다는 측면이 있습니다.&#8221;<br />
  &#8220;유행따라 온통 유리로 건물을 짓다보니 에너지 효율은 바닥입니다.&#8221;</li>
</ul>
<p>&#8216;건축미&#8217; 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마치 &#8216;유리 커튼월은 아름답다&#8217; 는 공식이 어느 교과서에 실려 있는가 보다.</p>
<p>2010년 1월 7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8220;성남시청사 &#8216;얼음폭탄&#8217; 대피소동&#8221; 의 내용을 보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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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8220;성남시 의회와 시청사 본관 건물을 연결하는 9층 높이의 장식용 철재파이프에 폭설로 얼어붙은 얼음 덩어리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기 때문이다&#8230;(중략)&#8230; 눈이 쌓인 철재파이프는 폭이 1m 가량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채 의회건물과 본관 건물을 덮고 있으며 전체 면적만도 수백㎡에 달한다. 하지만 시는 이 구조물이 건물 외형의 주요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데다 제거할 수 있는 구조물이 아니어서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8221;</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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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업비에 대한 비판, 안전관리에 대한 문제까지 모든 것이 디자인 때문이라니 이쯤되면 디자인이 사람을 잡을 지경이다. 우리나라 사정에 어두운 사람이 들으면, 건축가의 디자인 때문에 호화청사가 지어진다고 오해할지도 모를 일이다.</p>
<p>성남시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한 동안 건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았지만 &#8216;디자인=사치&#8217; 라는 인상만 남긴 채, 건축적인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고 지나갔다. 신청사 관련 기사 중 건축가의 인터뷰가 실린 적은 몇번이나 될까? 그 어느 때보다 건축 디자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설명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잘못된 건축에 대해 말은 많지만, 건축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어떤 것이 좋은 건축인지에 대해서 말해주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p>
<p>시민의 세금으로 지어지는 집이 &#8216;호화청사&#8217; 로 비난을 받고 있는 지금, 건축가는 무엇을 해야할까? 해명이 되었건 변명이 되었건 작은 오해라도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건축과 디자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에 올바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성남시의 모라토리엄 선언은 정치 경제적 이슈에서 그치지 않고 건축과 디자인에 대한 불신으로 확대될 수 있다. 성남시의 선언은 건축을 향하고 있다. 도마 위에 오른 건축. 모든 죄를 짊어지고 건축의 모라토리엄을 맞을 것인지 묻고 싶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0/12/sungnam02.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0/12/sungnam02-tm.jpg" width="750" height="562" alt="sungnam02.jpg"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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