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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레오퐁 &#187; @Architectur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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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Pop+Kitecture(Pop+Architecture) Magazine 팝키텍쳐 매거진</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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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792년, 저는 수원 화성 건설을 계획했습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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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9 Oct 2011 04:30:02 +0000</pubDate>
		<dc:creator>이 지은</dc:creator>
				<category><![CDATA[Story of Site]]></category>
		<category><![CDATA[수원]]></category>
		<category><![CDATA[정약용]]></category>
		<category><![CDATA[화성]]></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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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수원천은 화홍문을 통해 화성 내부로 흘러 들어간다. 오른쪽 위로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제 이름은 정약용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다산(茶山)’이라고도 부르지요. 한꺼번에 8가지 정도의 일을 해서 그런지 책도 많이 쓰게 되고 또 사람들에게도 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모양입니다. 뒤를 돌아보니 제 인생,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요. 하지만 인생의 황혼인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수원 화성(華城). 버들가지와 꽃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1-tm.jpg" alt="1792_01.jpg" width="750" height="498" /></a><br />
<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수원천은 화홍문을 통해 화성 내부로 흘러 들어간다. 오른쪽 위로 방화수류정이 보인다]</span></p>
<p>제 이름은 정약용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다산(茶山)’이라고도 부르지요.</p>
<p>한꺼번에 8가지 정도의 일을 해서 그런지 책도 많이 쓰게 되고 또 사람들에게도 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모양입니다.<br />
뒤를 돌아보니 제 인생,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요. 하지만 인생의 황혼인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p>
<p>수원 화성(華城).<br />
버들가지와 꽃이 흩날리던 방화수류정.<br />
장용영 군사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던 화성행궁.<br />
팔달단 정상에서 화성을 바라보시던 금상(今上:임금)의 미소..</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2.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2-tm.jpg" alt="1792_02.jpg" width="750" height="498" /></a><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화성행궁. 행궁은 도성 밖에 있는 임금의 임시 궁궐을 말한다. 온양행궁, 남한산성행궁등이 있었다.]</span></p>
<p>그 아름다운 곳에 제가 쏟아 부었던 땀과 그 많은 불면의 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p>
<p>1792년 겨울 저는 아버님 상중으로 한양을 떠나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 해 추운 어느날 금상께서 저에게 아주 희한한 일을 맡기셨습니다.<br />
홍문관의 직위를 가지고 있어도 모든 공무는 포기한 채 부모상을 지켜야 하는데, 그런 저에게 말씀 하실 정도니 꽤나 중요한 업무였지요.<br />
갓 30살을 넘긴 저에게 금상은 ‘새로운 도시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br />
허허….새로운 도시를 만들라니요. 그것이 그렇게 쉽게 만들어집니까.<br />
저의 당혹스러운 모습에 금상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p>
<p>“나는 이 새로운 도시가 백성들이 안전하게 잘 살수 있는 곳이 되길 바란다. 그것은 예전의 고루한 방식이 아닌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으로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대 가슴에 품어왔던 ‘그것’을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어떤가..”</p>
<p>성리학만이 아닌, 실학과 같은 폭넓은 학문을 통해 혁신적인 조선을 꿈꾸었던 저의 속마음을 금상은 알고 계셨고, 또 그 마음을 펼쳐 보라고 하신 겁니다.<br />
네…저에게 기회가 온 것입니다. ‘조부모상을 3년으로 하는 것이 맞는지, 5년으로 하는 것이 맞는지’로 온 나라가 싸우는 이 때, 전 그 기회를 반드시 잡기로 결심했지요.</p>
<p>저는 새로운 도시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안전이라고 생각했고 바로 조선에 가장 적합한 성곽을 계획했습니다. 물론 얼마 전 한강에 배로 다리를 만들어 본 경험은 있었지만, 성곽은 정말 큰 공사 아니겠습니까. 저는 먼저 조선의 성곽을 연구 한 후 조선에서 한번도 만들어 본적이 없는 새로운 성곽을 만들기로 했습니다.<br />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조선성곽의 문제점을 들어 유성룡이 제안한 『성설』, 중국 명나라 때 윤경의 『보약』등의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 한 후, 저만의 방식으로 다시 정리했습니다.<br />
제가 여러 종류의 학문에 대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저만의 ‘크게 분류하기’방식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지요.<br />
먼저 일곱 가지로 성곽 계획의 틀을 잡았습니다. 분류, 재료, 호참(성곽 둘레의 참호), 축기(터쌓기),벌석(돌 다듬기), 치도(도로), 조차(수레제작), 성제(성을 쌓는 법)외에 특히,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이제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거중기와 큰 돌을 손쉽게 운반하는 수레를 만들었지요. 유형거(遊衡車)는 바퀴가 아주 튼튼하고 경사지도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br />
얼마나 잘 만들었냐고 물으셨습니까?<br />
흠….예를 들자면, 이전의 수레 100대로 324일 걸려 운반할 짐을 유형거 70대로 154일만에 운반이 가능합니다.<br />
또한 거중기는 한 사람당 400근(약 240kg)을 들어 올릴 수 있어 공사기간을 빠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요. 금상께서도 이것으로 4만 냥 이상의 비용을 절약했다고 기뻐하셨습니다.</p>
<p>저는 화성의 전체 범위를 정하는 것이 모든 계획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략의 길이를 3,600보(약 4.24km)로 높이를 2장5척(7.75m)로 정했고 거기에 맞춰 석재, 기술자, 인부, 비용을 산출했습니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3.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3-tm.jpg" alt="1792_03.jpg" width="750" height="498" /></a><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서쪽의 서장대와 장안문을 이어주는 석축]</span></p>
<p>성곽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석재의 경우 가까운 곳에 석재 채취장을 찾아 운반 비용을 최소화 했고, 석재의 크기를 용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한 수레에 싣는 숫자를 일정하게 했습니다. 그래야 전체 수요량에 맞춰 계산 할 수가 있지요. 물론 이런 방식을 제가 완전히 새로 고안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확한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맞춰 일을 진행하는 것이 불필요한 비용과 시간의 낭비를 막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제가 추구하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이기 때문에 이번 화성에서 그 목적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p>
<p><img style="float: left; margin-top: 5px; margin-right: 20px;"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1792_04.jpg" alt="1792_04.jpg" width="485" height="397" /> <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 width: 505px; float: left; margin-bottom: 10px;">[성문을 보호하는 반원모양의 옹성]</span> 화성 성곽은 예전 우리 조상이 도성을 만든 성곽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예전엔 마을을 둘러 쌓고 있는 성, 즉 도성(都城)이 있었고 전쟁 시에 피난을 가서 몸을 숨기는 산성(山城)이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성을 두 종류로 만들어야 하고 또 관리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화성은 그 두 가지의 성을 합친 ‘방어와 공격이 가능한’ 성곽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br />
전쟁이 나서 화성 바깥으로 도망가지 않아도 우리 백성들을 지킬 수 있도록 말이죠. 화성은 그런 이유로 몇 가지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옹성(甕城)과 현안(懸眼)이 그것입니다.<br />
옹성은 성문 밖에 반원형 등의 형태로 한번 더 쌓은 성을 말합니다.</p>
<p>성문을 보호하는 기능 외에 전면으로 돌출되어 있어 다른 방향에서 성곽을 기어 오르는 적을 차단할 수 있게 했습니다. 중국에서 사용하던 방식인데, 임진왜란 후 유성룡의 제안으로 알려졌으나 조선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은 방식이었습니다. 화성의 네 군데 성문에 모두 옹성을 두어 화재로부터 성문을 보호하도록 했습니다.<br />
현안의 경우 성벽을 일정하게 뚫어 외부의 적을 감시하고 활을 쏘는 용도였으나 저는 조금 변형을 했습니다. 벽의 구멍을 45도 각도로 아래로 뚫어 성벽에 근접한 병사도 동시에 감시하고 뜨거운 물을 끼얹어 적을 물리치도록 했지요.</p>
<p>아..저는 그때 정말로 행복했습니다.<br />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같은 이용후생학자들의 글을 읽으며 현실적인 조선의 개혁을 꿈꾸던 제가 그 꿈을 화성에서 실현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br />
물론 금상이 아니셨다면 그런 저의 꿈들도 그저 ‘기이한 선비의 글장난’으로 끝났을테지요.</p>
<p>화성(華城)…..<br />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제 꿈이자 금상이 꿈꾸시던 이상의 공간입니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dasan.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10/dasan-tm.jpg" alt="dasan.jpg" width="750" height="694" /></a></p>
<p style="color: #808080;">일러스트레이션 : 금민</p>
<div style="font-size: 8.5pt; padding-top: 15px; color: #824008;">참고문헌 :<br />
정약용, 『여유당 전서』<br />
『정조실록』<br />
최홍규,『정조의 화성 건설』<br />
최홍규,『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br />
유봉학 외,『정조시대 화성 신도시 건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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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title>
		<link>http://leopon.co.kr/miew1351/2011/1985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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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3 Aug 2011 03:16:15 +0000</pubDate>
		<dc:creator>이 지은</dc:creator>
				<category><![CDATA[Story of Site]]></category>
		<category><![CDATA[궁궐]]></category>
		<category><![CDATA[수원]]></category>
		<category><![CDATA[역사]]></category>
		<category><![CDATA[정조]]></category>
		<category><![CDATA[조선]]></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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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예지야.. 환경전 왼쪽에 있는 건물로 가볼까? 소현세자가 돌아가신 후 약 100년 후에 조선의 희망이 바로 여기 경춘전에서 태어났어. 어릴 적 시련을 극복하고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해서 조선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왕이 태어난거야. 이분이 경춘전에서 태어났을 때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꿨던 아버지가 너무 기뻐 그림으로 그려 걸었을 정도였지. [정조가 태어났던 경춘전. 오른쪽으로 소현세자의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blockquote><p>예지야.. 환경전 왼쪽에 있는 건물로 가볼까?</p>
<p>소현세자가 돌아가신 후 약 100년 후에 조선의 희망이 바로 여기 경춘전에서 태어났어.</p>
<p>어릴 적 시련을 극복하고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해서 조선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왕이 태어난거야. 이분이 경춘전에서 태어났을 때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꿨던 아버지가 너무 기뻐 그림으로 그려 걸었을 정도였지.</p></blockquote>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4.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4-tm.jpg" alt="jungjo04.jpg" width="750" height="498" /></a></p>
<p><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정조가 태어났던 경춘전. 오른쪽으로 소현세자의 독살설이 나왔던 환경전이 보인다]</span></p>
<p>정조대왕(1752~1800) 조선 제22대왕.</p>
<p>할아버지 영조에 이어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를 만든 임금으로 서얼등용, 금난전권 폐지 등을 통해 이전의 군주가 보여주지 못했던 백성 중심의 정치와 강력한 왕권강화를 이루었는데 창경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문정전 앞에서 발생한 일대의 사건은 정조의 트라우마이면서 동시에 그가 이룬 업적의 배경으로 이해되기도 한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5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5-tm.jpg" alt="jungjo05.jpg" width="750" height="408" /></a></p>
<p><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창경궁의 편전, 즉 임금의 일상 업무를 보던 문정전. 영조의 첫번째 부인인 정성왕후의 혼전으로도 사용되었다]</span></p>
<p>1762년 윤5월 13일 영조는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문정전 앞으로 끌어내어 세자 자질을 이유로 자결을 명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목숨까지 포기하도록 한 이 사건 뒤에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차이와 노론과 소론 사이의 정치적 차이가 숨어있었다.</p>
<p>4살 때부터 사도세자를 성균관에 입교 시키며 혹독하리만치 철저하게 제왕교육을 시킨 영조는 자신의 기대치만큼 크지 못하는 아들에 대해 실망하기 시작했다. 실망감을 감추는 대신 아버지는 더욱 더 아들을 책망하며 그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세자 또한 부왕에게 반발하기 시작했는데, 주색에 빠지고 궁녀를 죽이는 등 그의 비행은 온 도성 안의 화제였다.</p>
<p>한때는 문무에 출중하고 명석한 두뇌(15세에 벌써 아버지를 대신해 대리청정까지 했다)와 무사적 기질을 보였던(효종이 사용하던 청룡도가 매우 무거워 무예의 고수들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는데, 사도세자는 15~16세부터 이 청룡도를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신체조건과 무예에 능했다)사도세자는 이렇게 궁궐 안의 문젯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p>
<p>영조의 지지세력인 노론은 이때다 싶어 사도세자의 지지세력인 소론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도세자의 기행을 영조에게 고하기 시작했다.</p>
<p>1762년(영조 38) 5월 22일 노론파인 나경언의 고변서를 통해 사도세자의 비행이 정식으로 영조에게 알려졌다. 아들에 대한 처리문제에 고심하던 영조는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로부터 세자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고 아들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p>
<p>자신을 낳아준 생모에게서도 내침을 받은 세자는 자결을 하려 하였으나, 주변 소론세력의 저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른 영조는 문정전 앞뜰로 뒤주를 가져오게 한 뒤, 아들을 밀어 넣고 자신이 직접 못을 박고 자물쇠를 달았다고 한다.</p>
<p>￼</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3.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3-tm.jpg" alt="jungjo03.jpg" width="750" height="498" /></a><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수원 화성행궁에 복원된 뒤주. 뒤주는 예전에 쌀을 보관하던 나무통을 말한다]</span></p>
<p>이때 11살 원손(왕세자의 맏아들)이였던 정조는 뒤주 앞으로 달려 나와 할아버지에게 애걸하였다.</p>
<p>“아버지를 살려 주십시오!”</p>
<p>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4학년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죽는 것을, 그것도 자신이 존경하는 할아버지에 의해 살해 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셈인데, 인생이 완전히 뒤틀리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영조는 이어 왕세손인 정조를 바로 왕세자로 책봉하고 일종의 협상을 하게 된다.</p>
<p>“네 아비의 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하면 안된다. 이 일에 가담했던 사람들조차 언급하지 말거라. 나에게 그걸 약속해 다오.”</p>
<p>14년 후 왕이 되기까지 정조는 매일 매일 조용히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한숨짓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모습에서, 사도세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 하는 할아버지 영조의 모습에서, 아버지를 죽이라고 소리치던 노론세력의 모습에서 말이다.</p>
<p>1776년 3월 10일, 경희궁에서 즉위한 첫날 모든 대신들은 긴장하면서 왕의 첫마디를 기다렸다.</p>
<p>“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실록. 정조1년&lt;1776&gt; 3월 10일)</p>
<blockquote><p>예지야…</p>
<p>아마 엄청난 충격이었을꺼야. 사도세자의 뒤주 사건 이후 그에 대한 모든 얘기는 금기가 되었거든. 그런데 그 얘기를 아들이 즉위 첫날 처음으로 언급한거야.</p>
<p>정조 임금님이 그 이후 어떤 왕이 되었는지 궁금하지?</p>
<p>이제는 창덕궁 후원 가볼까…?</p>
<p>많은 사람들이 비원이라고 하는데, 비원은 후원을 관리하던 기관의 이름이자, ‘비밀의 정원’이라는 의미로 일제 강점기때 잠시 붙여진 이름이기도 했으니까 이제는 정확한 이름인 후원이나 금원이라고 불러야 해.</p></blockquote>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6.jpg"><img style="margin-right: 2px;"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6-tm.jpg" alt="jungjo06.jpg" width="374" height="562" /></a><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7.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7-tm.jpg" alt="jungjo07.jpg" width="374" height="562" /></a></p>
<p><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왼쪽 - 후원에 있는 관람지와 관람정, 오른쪽 - 옥류천]</span></p>
<blockquote><p>후원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인 부용지 위에 보이는 건물은 주합루이자 규장각이야. 1층이 왕실 도서를 모아둔 규장각이고 2층은 열람실로 주합루라고 부르는데, 요즘에 전체 건물을 주합루라고 부른단다.</p></blockquote>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1-tm.jpg" alt="jungjo01.jpg" width="750" height="502" /></a></p>
<p><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창덕궁 후원에 있는 주합루. 바로 앞에 큰 문에는 임금이 양쪽의 작은 문에는 신하가 출입하였다.]</span></p>
<p>정조의 업적의 대부분은 인본주의적 왕권강화와 관련되어 있다. 영조시절부터 특정 정치세력에게 힘이 독점되는 것을 막기 위한 탕평책이 실시되었고, 정조는 이것을 이어 받아 서얼에게도 탕평책을 쓰게 되었다. 서얼이란 본 부인이 아닌 첩의 자식으로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살아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없어 능력이 있어도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가던 그들을 과감히 등용하여 규장각에서 일하게 한 것이다. 원래 왕실의 도서를 관리하고 선왕의 글을 정리하는 기관이었던 규장각은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그 시대 최고의 두뇌가 모였던, 일종의 ‘씽크탱크’ 역할을 했다.</p>
<p>또한 종로의 육의전과 시전 상인이 가지고 있었던 금난전권(상권을 독점하기 위해 정부와 결탁하여 개인의 상업권을 금지했던 권리)을 폐지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육의전 물품을 제외한 모든 물품에 대해서 누구라도 팔 수 있다는 권리를 인정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18세기 세계는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상업의 가치와 자유경제에 대한 백성들의 요구를 국가가 들어줬다는 것이다. 백성의 아비로서 군림하는 것이 아닌, 백성의 소리를 들어주는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p>
<p>실제로 다른 왕과 달리 정조는 백성에게 공고하는 문서인 윤음(綸音)에 한글을 종종 사용했다. 어려운 한자보다 널리 알려진 쉬운 한글로 써서 많은 백성들이 직접 왕의 말을 알 수 있도록 했다.</p>
<p>조선의 27대 왕 중 유일하게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를 남겼을 정도로 학자형 군주였던 정조는 단순히 글만 읽는 왕이 아니였다.</p>
<p>조선 시대 건축과 도시계획사에 큰 획을 그은 최대의 신도시 프로젝트를 진행 했다.</p>
<p>‘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는 평을 받는 수원 화성을 건설한 것이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2.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8/jungjo02-tm.jpg" alt="jungjo02.jpg" width="750" height="498" /></a></p>
<p><span style="font-size: 10px; color: #70440d;">[화성을 둘러싸고 있는 네 군데 큰 문중 하나인 화서문과 서북공심돈]</span></p>
<div style="font-size: 8.5pt; padding-top: 15px; color: #824008;">참고문헌 :『정조실록』</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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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유럽트라이앵글 &#8211; intr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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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9 Jul 2011 04:22:14 +0000</pubDate>
		<dc:creator>gone0501</dc:creator>
				<category><![CDATA[Ark Tour]]></category>
		<category><![CDATA[여행]]></category>
		<category><![CDATA[유럽]]></category>
		<category><![CDATA[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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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시작전에) 유럽여행의 불씨를 만들어 준 한권의 책 내 인생에서 뒤늦게 유럽행을 결정하게 된 이야기를 시작으로 유럽여행기를 이어보고자 합니다. 한국의 옛 건축에 대한 공부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한국과 가까운 동아시아권의 국가들에 관심이 쏠렸고, 줄곧 그 곳의 역사적인 건축물들를 찾아 답사를 가곤 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유럽배낭여행을 꿈꾸지만 나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유럽여행을 계획해본 적이 없었다. 우선은 금전적으로 감당이 안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시작전에) 유럽여행의 불씨를 만들어 준 한권의 책</p>
<pstyle ="text-align: center"><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6/건축의이론과역사1.jpg"><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12713"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6/%EA%B1%B4%EC%B6%95%EC%9D%98%EC%9D%B4%EB%A1%A0%EA%B3%BC%EC%97%AD%EC%82%AC1.jpg" alt="" width="275" height="391" /></a></p>
<p>내 인생에서 뒤늦게 유럽행을 결정하게 된 이야기를 시작으로 유럽여행기를 이어보고자 합니다.</p>
<p>한국의 옛 건축에 대한 공부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한국과 가까운 동아시아권의 국가들에 관심이 쏠렸고, 줄곧 그 곳의 역사적인 건축물들를 찾아 답사를 가곤 했었다.</p>
<p>대부분의 학생들이 유럽배낭여행을 꿈꾸지만 나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유럽여행을 계획해본 적이 없었다. 우선은 금전적으로 감당이 안 될뿐더러, 가면 좋겠지만 그 전에 중국이나 일본의 오래된 고대도시를 가고 싶은 것이 당시의 바람이었고, 전공 공부의 연장선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p>
<p>대학원에서 모던기에 대한 수업을 듣던 중 하나의 세미나준비를 해야만 했었다. 두 권의 책을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나누어 준비하는 것이었는데, 한 권은 당시 번역되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신간이었고, 한 권은 이미 절판되어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이었다. 두 권 다 흥미로웠지만, 왠지 모르게 새로나온 책이 끌렸고, 그 책의 첫 번째 챕터를 맡아 준비하게 되었다. 이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이어서 부담이 될 것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타이틀만 보고 선택했던 챕터. 책 한권도 아닌, 한 챕터를 이해하는데 도서관에서 며칠을 보내며 고민했고 이 책 한권이 나를 뒤늦게 유럽여행으로 이끌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p>
<p>책의 구성은 이렇다.</p>
<p>Ⅰ. 근대건축과 역사의 쇠퇴</p>
<p>Ⅱ. &#8216;부차적 대상&#8217;으로서의 건추고가 비평적 주의력의 위기</p>
<p>Ⅲ. 메타언어로서의 건축：이미지의 비평적 가치</p>
<p>Ⅳ. 실무적 비평</p>
<p>Ⅴ. 비평의 도구</p>
<p>Ⅵ. 비평의 과제</p>
<p>이 중에서 ‘근대건축과 역사의 쇠퇴’라는 챕터가 내 유럽여행의 발판을 만들어 줌 셈이다.</p>
<p>서양의 예술을 뒤흔들고 여러 곳에 영향을 미친 중심지가 이탈리아였다는 것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 이후에 이를 이어가고 받아들여가는 과정에 대한 이들의 고민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최고의 것들이 가득한데 무엇이 더 필요한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p>
<p>급격한 산업화와 더불어 이전과는 다른 성격의 건축물들이 필요했고, 이런 문화적인 충돌,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괴된 오래된 건축물들을 고치는데에 대한 고민들이 현재까지도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p>
<p>여행 전에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곳곳을 둘러 볼 수 있도록 해준 책이었다. 어렵긴 하지만 감히 누구나에게나 추천해주고 싶은 책. 이 책의 이야기로 유럽 여행기를 시작한다.</p>
</p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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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창경궁에 숨겨진 비극.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title>
		<link>http://leopon.co.kr/miew1351/2011/1839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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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6 Jul 2011 01:51:41 +0000</pubDate>
		<dc:creator>이 지은</dc:creator>
				<category><![CDATA[Story of Site]]></category>
		<category><![CDATA[궁궐]]></category>
		<category><![CDATA[역사]]></category>
		<category><![CDATA[조선]]></category>
		<category><![CDATA[중국]]></category>
		<category><![CDATA[창경궁]]></category>
		<category><![CDATA[환경전]]></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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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여기 창경궁에서 있었던 큰 사건중에 하나가 소현세자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데 환경전은 대장금이 어의로 있었던 중종 임금님이 승하하셨던 곳이지만, 또한 소현세자가 독살 당한 장소로-아직도 정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class="tweet_said" style="line-height:1.5em;">
<p>예지야, 이모랑 창경궁 가자.<br />
응…? 아..알아…궁궐 재미없지?<br />
비슷비슷한 건물에 공포, 상량, 팔작지붕..왠 어려운 말만 잔뜩 써놓고.<br />
결정적으로 한문은 왜 그렇게 많은지&#8230;<br />
건물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고 또 아무것도 없는 마루, 온돌방을 무슨 재미로 보겠어.<br />
심지어 이모가 궁궐지킴이로 자원 봉사하는 창경궁은 그나마 남아 있는 건물도 거의 없으니&#8230;</p>
<p>대신 이모가 창경궁에서 만난 멋진 남자얘기 해줄께.<br />
똑똑하고 담대하고 마음이 열린 남자말야. 자기가 살던 조선 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넓은 세계를 이곳 한국으로 끌어 들이려고 했던 멋진 남자. (예지야…너도 커서 이런 멋진 남자 만나길 바래!)</p>
</div>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6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6-tm1.jpg" width="750" height="498" alt="sohyun06.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궐내각사(현대적 의미의 정부종합청사)에서 바라본 창경궁]</span></p>
<p>조선 16대 임금님인 인조의 첫번째 아들이면서, 17대 임금님인 효종의 큰형이였던 소현세자.<br />
한국에서 소현세자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제대로 임금님이 된적도 없이 그저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람이니까 말이다.<br />
여기 창경궁에서 있었던 큰 사건중에 하나가 소현세자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데 환경전은 대장금이 어의로 있었던 중종 임금님이 승하하셨던 곳이지만, 또한 소현세자가 독살 당한 장소로-아직도 정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4.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4-tm1.jpg" width="750" height="498" alt="sohyun04.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창경궁 안에 있는 환경전]</span></p>
<p>소현세자는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쟁한 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세자다. 항복의 몇 가지 조건 중 ‘왕의 장자를 청나라(정확히는 후금)로 보내 화친의 징표로 삼는다’ 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때 소현세자가 자원해서 중국 심양(지금의 선양)으로 가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한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길에 나와서 소현세자의 심양길을 울면서 배웅했다고 한다. 물론 다음 임금이 될 세자의 포로생활을 염려한 것 일 수도 있지만, 병자호란 이후 완전히 파괴된 자신들의 삶과 전쟁포로로 같이 끌려가는 친척, 가족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p>
<p>심양에서의 소현세자는 어떻게 살았을까?<br />
운명을 탓하면서 글을 쓰거나, 술에 빠져 살았을까?<br />
소현세자를 조선의 큰 희망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심양에서의 그의 행동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행동했다. 포로로 끌려간 조선사람들은 대개 청나라 사람들의 노예로 일했는데, 조선으로 도망가다가 잡히면 발뒤꿈치의 뼈를 잘라내서 다시는 뛰지 못하도록 만들 정도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한 비참한 조선노예들의 실상을 본 소현세자는 그저 조용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청나라와의 끈질긴 협상으로 –협상이 안되면 돈으로 사서- 그들을 다시 조선으로 돌려 보냈다. 이런 소현세자 뒤에는 ‘조선 최초의 여성 CEO’라고 불리는 세자빈 강씨의 역할도 컸다. 중국과 조선 사이에서 무역을 하면서 돈을 모았고 이 돈으로 포로들를 사서 조선으로 돌려 보냈고, 심양 근처에 논밭을 사서 그곳에 거주하는 조선사람들이 농사를 짓게 했다. 처음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중국 심양에 도착했을 때 조용한 촌락이였던 심양이 상인들과 조선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또한 조선이 명나라를 이은 세계 최고의 나라고 조선을 침략한 말갈족(청나라)은 미개한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조선 임금과 선비들과 다를 바 없었던 그는 훨씬 현실적이고 과학기술이 뛰어난 청나라를 경험하고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런 청나라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한 동생인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달리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책과 천체 관측기구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담 샬이라는 독일 예수회 신부를 만나게 된다. 아담 샬은 중국에서 천체관측에 대한 책을 발간했고 소현세자와도 친해 로마 카톨릭과 유럽의 문물을 소개했다.<br />
소현세자는 9년간의 인질 생활 동안 조선과 청을 이어주는 외교관과 몽골어를 배우는 등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던 지식인이였다고 할 수 있다.</p>
<p>1645년 음력 2월, 소현세자는 자신이 배운 폭넓은 지식과 경험으로 조선을 크고 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큰 꿈을 품고 9년간의 길고 긴 포로 생활 끝에 귀국하게 된다.<br />
돌아온 첫날 그는 아버지인 인조 임금 앞에서 그의 꿈을 말하기 시작했다.<br />
‘청나라(후금)는 아주 발전된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청나라를 배워서 좀더 강하고 잘사는 조선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 보세요. 이 많은 책들과 천체기구들…’ 인조는 더 듣지도 않고 벼루를 들어 아들의 얼굴을 내려쳤다고 한다.<br />
그는 1637년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삼전도의 굴욕(삼배구고드례:청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항복절차)이라고 하는 치욕적인 사건을 겪어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다. 항복 이후 인조는 환경전 바로 뒤에 있는 침전 중 하나인 양화당에 칩거하며 청나라 사신이 오면 아프다는 이유로 누워서 사신을 접견하기도 했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5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5-tm1.jpg" width="750" height="498" alt="sohyun05.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인조가 병을 이유로 칩거하며 청나라 사신을 맞이했던 양화당]</span></p>
<p>많은 이들은 인조가 아들인 소현세자를 경쟁자로 봤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조선인 포로를 돌려보내준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조선 내에서도 소현세자의 인기가 꽤 높았던 그 시기에, 자기를 제치고 바로 왕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 ‘어떠한 조치’를 취했을 수도 있다.<br />
문제는 청나라에서 돌아오고 채 2개월도 지나지 않아 음력 4월 26일 소현세자가 급사하며 터졌다.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소현세자의 온몸이 새까맣게 변해 검은색 천을 얼굴에 갖다 대니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고, 온몸의 9개 구멍에서 피가 나온 흔적이 보인다’라고 증언했던 것이다(인조실록 23년 음력 6월 27일). 이후 소현세자의 독살설이 퍼졌고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p>
<p>소현세자 독살설 이면에 아버지인 인조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란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 근거한다. 첫번째는 소현세자에게 마지막으로 침을 놓은 어의 이형익을 인조가 그냥 살려줬다는 것이다. 학질에 걸렸다는 소현세자에게 인조는 어의인 이형익을 보냈고 그가 침을 놓은 후 사흘 만에 세자는 사망하였다. 왕위를 이을 세자가 그렇게 급사할 경우 어의들은 문책을 받아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도 있는데, 인조가 오히려 그를 두둔했다.<br />
두번째는, 소현세자의 사망 후에 인조가 그 가족들에게 했던 행동 때문이다. 소현세자의 부인인 세자빈 강씨는 임금님이 드실 전복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궁궐에서 쫓아냈다. (죄인인 경우 정문인 홍화문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서 바로 옆 선인문으로 나갔다. 사약을 받은 장희빈의 시신도 이 문을 통해서 나갔다.)</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3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3-tm.jpg" width="374" height="248" alt="sohyun03.jpg" style="margin-right:2px;" /></a><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2.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2-tm1.jpg" width="374" height="248" alt="sohyun02.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왼쪽 사진 :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 오른쪽 사진 : 장희빈 시신과 세자빈 강씨가 쫓겨 나간 선인문]</span></p>
<p>원래 세자가 죽으면 세자의 첫번째 아들이 이어서 세자가 되는데, 인조 임금님은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다음 세자로 책봉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모두 제주도로 귀양 보내 그 집안을 완전히 해체해 버렸다.</p>
<p>역사에 ‘~였다면?’은 결코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소현세자가 죽지 않고 임금님이 되었다면 지금 한국의 모습은 많이 달려지 않았을까? 효종 임금부터 조선은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고 조용히 지내기 시작했으니 그 대신 소현세자가 임금이 되어 조선의 문을 열고 새로운 사상과 기술을 받아들이고 세상과 교류했다면&#8230;?</p>
<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7/sohyun01-tm1.jpg" width="750" height="499" alt="sohyun01.JPG" /></a><br />
<span style="font-size:10px;color:#70440d;">[궁궐의 정전(가장 높은 지위의 건축물)중 가장 오래된 명정전(1616)과 신하들이 서있던 조정]</span></p>
<div class="tweet_said" style="line-height:1.5em;">
<p>이모는 소현세자 독살설을 알게 된 후 다시 환경전을 봤을 때 정말로 울컥했단다. 그 전에 봤을 때는 다른 곳과 같은 궁궐 건물인데, 여기에서 이모가 반한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환경전이 더 이상 평범한 궁궐 건물이 아니게 된거야.</p>
<p>아…예지야, 소현세자가 죽었다고 조선의 모든 희망이 사라진건 아니야. 약 100년 후에 또 하나의 희망이 창경궁에서 태어난단다. 그 이야기는 이 다음 건물에서 얘기해줄께.</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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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십만개의 스테이플로 세운 도시, Ephemicropolis 201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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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8 Jun 2011 05:26:26 +0000</pubDate>
		<dc:creator>leopon9</dc:creator>
				<category><![CDATA[Concept]]></category>
		<category><![CDATA[개념]]></category>
		<category><![CDATA[도시(Urban)]]></category>
		<category><![CDATA[재난]]></category>
		<category><![CDATA[재해]]></category>
		<category><![CDATA[지진]]></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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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6x3m 바닥 위에 십만개의 호치케스(스테이플러) 심으로 세운 도시. 온전한 호치케스 심 하나가 대략 12cm 정도가 된다고 한다. 심의 길이를 조절해 가면서 대리석 바닥 위에 점착제도 없이 호치케스 심 그대로를 세워 만든 피터 루트(Peter Root)의 Ephemicropolis 2010. 약 40시간 동안을 공들여 세운 피터의 도시. 이 도시는 안전할까? 최근 우리는 지진, 해일, 홍수&#8230;. 등 자연재해 앞에서 무력하게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6/ephemicropolis_01.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6/ephemicropolis_01-tm.jpg" width="750" height="562" alt="ephemicropolis_01.jpg" style="margin-bottom:5px;" /></a><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6/ephemicropolis_02.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6/ephemicropolis_02-tm.jpg" width="374" height="280" alt="ephemicropolis_02.jpg" /></a><a href="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6/ephemicropolis_03.jpg"><img src="http://leopon.co.kr/wp-content/uploads/2011/06/ephemicropolis_03-tm.jpg" width="374" height="280" alt="ephemicropolis_03.jpg" style="margin-left:2px;" /></a></p>
<p>6x3m 바닥 위에 십만개의 호치케스(스테이플러) 심으로 세운 도시. 온전한 호치케스 심 하나가 대략 12cm 정도가 된다고 한다. 심의 길이를 조절해 가면서 대리석 바닥 위에 점착제도 없이 호치케스 심 그대로를 세워 만든 피터 루트(Peter Root)의 Ephemicropolis 2010. 약 40시간 동안을 공들여 세운 피터의 도시. 이 도시는 안전할까?</p>
<p>최근 우리는 지진, 해일, 홍수&#8230;. 등 자연재해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는 문명을 목격하고 있다. 마치 피터의 도시처럼 말이다. 가벼운 바람과 나뭇잎 하나 만으로도 도시는 산산조각 날 수 있다. 작가는 Ephemicropolis 2010을 통해 도시의 종말을 말하고 있다.</p>
<p>연이은 재난과 재해 속에서 지구인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떤 건축, 어떤 도시를 준비해야할까?</p>
<p><iframe src="http://player.vimeo.com/video/10875342?title=0&amp;byline=0&amp;portrait=0&amp;autoplay=1" width="751" height="563" frameborder="0"></iframe></p>
<p style="color: #808080;"><font size="5"><span style="font-size: 18px;">Ephemicropolis 2010</span></font><br />
100,000 Staples<br />
Approx floor area 600x300cm</p>
<p style="color: #808080;">Stacks of staples were broken into varying sizes from full stacks about 12cm high down to single staples. These stacks were then stood up and arranged over a period of 40 hours. Each stack of staples is free-standing, without glue or magnets to support them. The whole installation is highly vulnerable to micro-apocalyptic events; a light breeze, or a falling leaf would cause the city to crumble.</p>
<div style="font-size:8.5pt;padding-top:15px;">
  <font color="#824008">자료제공 : Peter Root |</font> <u><a href="http://www.peterroot.com/" target="_blank"><font color="#824008">www.peterroot.com</font></a></u>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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