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뭐 하나 살 때도 바로 옆 슈퍼마켙에 가지 않고 조금 더 걸어서 편의점에 간다. 딱히 슈퍼마켙이 싫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저 습관처럼 저절로 발걸음이 그리로 옮겨진다고 해야 할까. 사실 언제부턴가 슈퍼마켙 보다는 편의점이 더 살갑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일단 슈퍼마켙엔 어쩐지 없는 게 많을 것 같고 (실제로도 그러하지만) 가진 것 없는 자취생에게는 인스턴트 음식이나마 따뜻하게 데워주기까지 하는 편의점이 말 그대로 한결 편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24시간 열려있어 아무 때고 찾아갈 수 있는데다 깨끗하기까지 하니 편의점이 더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 가끔 이것저것 살 게 많은 날엔 조금 더 걸어서 대형마트에 간다. 무엇이든 소량으로 살 수 없다는 단점은 있으나 일단 싸고, 없는 게 없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쨌거나 그래서 나는 요즘 동네 슈퍼마켙을 찾지 않는다. 집 근처에 두 군데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최근들어 갑자기 슈퍼마켙이 그리워졌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별다른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문득 어린 시절 겪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날, 그러니까 약 15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하교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배가 고팠다. 그런데 집엔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밥을 해먹자니 귀찮기도 했거니와 마땅히 함께 먹을 반찬도 없었다. 하지만 내 주머니 역시 배가 고프긴 마찬가지. 그래서 결국 할아버지가 냉장고에 넣어두신 10원짜리들을 싹싹 긁어모았다. 그당시 –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 할아버지는 집에 복이 굴러들어올 거라면서 냉장고에 동전들을 넣어두시곤 하셨던 것이다. 당시 라면 값은 대략 300원 정도. 내가 사려던 라면이 얼마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무튼 30원이 모자랐다. 아, 지금 생각해도 30원이 모자라서 라면을 살 수 없다니…… 애통함이 폴폴 밀려올라와 눈물이라도 펑펑 흘려야 할 것 같다. 사실 그 당시의 나는 정말 그랬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이야 그깟 라면 안 먹어도 그만이지만 한창 성장기에 있던 나는 270원만 들고 슈퍼마켙에 찾아가야 할 만큼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그 돈을 들고 동네 슈퍼마켙 주인 아줌마 앞에 섰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줌마, 30원만 깎아주세요”
아줌마가 나를 쳐다봤다. 돈 좀 없는 게 뭐 그리 부끄러운 일이라고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죄진 사람처럼 서있던 내 모습이 그려진다. 만약 지금이라면 어땠을까. 편의점에 찾아가서 “알바생님, 30원만 깎아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아마 생각할 것도 없이 대번에 거절당할 것이다. 어이 없다는 시선과 비웃음도 덤으로 함께 받겠지. 하지만 동네 슈퍼마켙 아줌마는 그러지 않으셨다. 외려 사람 좋은 웃음 함박 날려주시며 비웃음 대신 생계란 한 개도 덤으로 주셨던 것이다. 쭈뼛거리는 내게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자존심은 세워주고 싶으셨는지 “담에 가져오든가”라며 한 마디 더 날려주시는 센스. 지금 돌이켜보니 정말 인정이 차고 넘치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고 보면 동네 슈퍼마켙엔 정이 있었다. 어차피 같은 동네 사람 상대로 장사를 하다보니 꼬마 한 명 지나가도 뉘집의 누군지 다 아는 처지라 못 믿을 것도 없었겠지만 결국엔 그게 情아닐런지. 가끔 급할 때면 외상도 척척 해주고 또 애누리가 빠지면 섭섭하지. 지금은 동네 슈퍼마켙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 되기는 했지만 겨울이면 가게 한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던 연탄난로에 구운 쥐포도 정말 꿀맛이었다. 학교 끝나고 사먹었던 50원짜리 아이차 쭈쭈바랑 50원짜리 달려라하니는 또 어떤가. 두부 한 모만 사오라고 닥달하는 엄마의 심부름은 귀찮았어도 100원짜리 하나 사도 싸구려 초콜릿 하나를 덤으로 주던 아줌마의 선심은 좋았던 그 시절. 한 때는 맨날 맛있는 거 공짜로 다 먹는다고 슈퍼집 딸을 부러워하기도 했으니 이제와서 내가 동네 슈퍼마켙을 무시하는 게 어불성설일지도. 요즘들어 대기업들이 동네 슈퍼마켙까지 밀고 들어온다고 중소상인들이 난리가 났던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얼마 전, 집 근처 단골 편의점에서 50원을 깎아준 일이 있었다. L사 적립카드가 없어서 맨날 오는데도 혜택이 없다며 새로 바뀐 젊은 주인이 인심을 쓴 것이었다. 동네 슈퍼마켙, 언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지도 모르지만 그 인심만큼은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