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에서 출발해 런던을 경유, 암스테르담의 스키폴(Schiphol) 공항에 내린 시간은 현지시각으로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민박집에 전화를 걸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차창 밖의 어두운 풍경을 바라봤다. 이것이 네덜란드구나! 어둠 속에서도 차창 밖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 것은 단지, 여행지에서 느끼는 긴장이나 설레임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음날, 본격적으로 일정이 시작하면서, 네덜란드에 대한 정서적인 충격은 점점 크게 느껴졌다.
국토의 1/4이 해수면보다 낮아, ‘낮은 땅’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 하나 있다. 바다에 댐을 세우고 흙을 메워 만든 땅, 네덜란드에는 사방 팔방 어디 방향을 보아도 지평선과 수평선 뿐, 낮은 언덕조차 없다. 30여년간 능선 속에서 고개를 넘으며 살아온 내게 온통 평지뿐인 네덜란드의 지형은 심리적인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무언가 가슴 속 한 구석이 허전한 느낌! 네덜란드에서의 일정이 하루하루 더해지는 동안, 내가 느낀 ‘지형적인 특징으로 인한 정서적인 이질감‘이 네덜란드 건축의 특징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랜드마크라 할만큼 개성있는 건축물을 찾기 힘들지만, 네덜란드는 ‘현대건축의 박물관’이라 할 만큼 도시 곳곳에 독창적이고 특이한 건축물이 가득하다. 그들의 건축은 어떻게 세계적인 브랜드 가치를 갖게 되었을까? 낮은 구릉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이들의 땅에서 건축은 자연을 대신해야할 역할과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에선 남산만 올라도 도시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그곳을 오르지 않더라도 방향을 잡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산이 있고 언덕이 있고, 고개가 있다는 것은 공간지각을 위한 랜드마크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굽이굽이 고개길은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신비와 기대감을 만들어 낸다. 언덕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그곳에 오르기 전까진 알 수 없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를 영화적인 시퀀스로 설명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인데, 부석사를 오르는 동안 조금씩 드러나는 색다른 장면들과 마지막 정상에 올라 석양을 마주하고 내가 오른 길을 내려다 보는 절정의 순간, 그때 느끼는 카타르시스. 대한민국 전통건축의 공간심리적 구성이 자연적인 지형에 바탕을 둔 것이란 점을 네덜란드에서 새삼 느끼게 되었다.
산이 많은 우리의 지형과 달리, 평지 뿐인 네덜란드의 지형에서는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다. 시작과 끝, 모두가 한눈에 들어온다. 원근의 차이만 있을 뿐, 도시의 모든 것들이 소실점에 이르기까지 늘어서 있다. 수평선과 지평선뿐인 자연환경은 심리적으로 공허함을 느끼게 한다. 이런 가운데 건축은 자연을 대신해 랜드마크의 기능과 시각적 재미를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건축이 자연이나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중요시하고, 그들의 건축이 오브제로서의 가치를 발견하는데 상대적으로 의미를 둘 수 밖에 없는 것, 이 모두가 지형적인 특성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네덜란드는 베아트리스 여왕의 통치하에 있는 입헌군주국이다. 여왕의 나라, 네덜란드에서는 공사 중인 현장을 제외한 어떤 땅도 조경이나 건축의 관리 없이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한다. 잔디를 심고, 꽃을 심고, 건축물을 세운다. 복토된 맨 땅, 관리되지 않은 빈 땅을 여왕 스스가 벌겨벗겨진 듯한 수치로 여긴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건축은 대한민국의 건축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댐을 지어 만든 그들의 땅에서 건축은 곧 자연을 의미(부족한 자연을 복원한다는 의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