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무엇을 의미할까?
적나라한 베드신과 불륜을 다루고 있는 완전한(?) 18이상 관람가의 영화가 아이러니하게도 “리틀 칠드런”. 작은 아이들이라니. 곧바로 떠오르는 건 사라(케이트 윈슬렛 분)의 딸과 브랫(패트릭 윌슨 분)의 아들, 이 두 아이겠지만, 사실 이 영화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리틀 칠드런’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는 한 작고 한적한 마을에 성추행범이 이주해왔다는 뉴스보도로 시작힌다. 그의 이름은 노널드 제임스 맥고비. 집밖의 사람들에게 그는 두렵고 경계해야할 괴물인지 몰라도 노모에겐 착하기만한 노총각 아들일 뿐이다. 영화는 사라와 브랫의 불륜을 따라가다 중간중간 성추행범, 맥고비의 삶을 교차해 보여준다. 맥고비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노모의 모습을 통해, 어떤 범죄자도 결국 누군가의 아들 딸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맥고비 스스로도 노모의 사랑 앞에서 자신의 성도착을 벗어내려는 의지를 보인다는 점에서 범죄자의 인간적인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욕망, 본능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의 모습과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고통받는 모습까지 이 모두가 불완전한 우리 자신의 일면이며,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리틀 칠드런>에서 맥고비는 인간의 불완전한 본성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실직한 전직경찰, 래리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트라우마에 갖혀 실수를 거듭하면서 인생 자체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매번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본능과 욕정 앞에 나약하게 흔들리고 이런 의지 박약의 충동적인 행동은 어린 아이들의 돌발행동처럼 무모하고 비이성적이라 할 수 있고 이런 점에서 불안정한 우리들 모두를 ‘작은 아이”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과 같은,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본능에 가까운 실수를 연발하며 살아간다. 브랫이 사라에 대한 감정을 자각하는 순간에 브랫의 이성은 정지되어 버린다. 아내, 캐시의 긴 다리와 윤기나는 머리칼, 완벽한 가슴에 비해, 사라는 키도 작고 남자같은 외모에 굵은 눈썹까지…. 어떻게 봐도 자기 스타일이 아닌데, 자꾸 그녀가 떠오르고 그립다는 브랫의 마음.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고, 이때부터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나 아이처럼 돌진하기 시작한다.
영화가 말하고 있는 ‘작은 아이들’ 이란, 실수하는 인간이며, 통제할 수 없는 본능과 욕망 앞에 선 충동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이런 인간에 대한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사라의 딸, 루시가 홀린 듯이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고 서 있는 장면이 그것이다. 밤거리의 가로등 아래엔 불빛을 보고 모여든 나방의 무리가 쉴새 없이 등불에 몸을 부딪힌다. 생물시간에 배웠듯이 불빛이 나방의 본능을 자극하고 이 자극에 반응한 나방이 불빛을 향해 날아든다는 것.
맥고비가 성추행을 했던 이유, 래리가 밤마다 맥고비 집 앞에서 화풀이를 하는 이유, 사라의 남편이 인터넷 페티쉬에 중독된 이유, 브랫이 십대들의 스케이트 보딩에 도전하다 구급차까지 타게되는 이유, 사라와 브랫이 가정을 버리고 도망가려했던 이유…. 모든 것들이 루시가 바라본 나방들처럼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몸짓들이고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들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판단 자체가 무의미 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리틀 칠드런>은 이런 모든 것들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하고 있다.
루시가 가로등 불빛 아래서 나방들의 날개 짓에 취했듯, 우리는 이 영화를 루시와 같은 시선으로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영화 속 인물들 모두가 가로등 빛에 홀려 그러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자. 우린 모든 작은 아이일 뿐이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