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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저는 수원 화성 건설을 계획했습니다.

1792_01.jpg
[수원천은 화홍문을 통해 화성 내부로 흘러 들어간다. 오른쪽 위로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제 이름은 정약용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다산(茶山)’이라고도 부르지요.

한꺼번에 8가지 정도의 일을 해서 그런지 책도 많이 쓰게 되고 또 사람들에게도 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모양입니다.
뒤를 돌아보니 제 인생,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요. 하지만 인생의 황혼인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수원 화성(華城).
버들가지와 꽃이 흩날리던 방화수류정.
장용영 군사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던 화성행궁.
팔달단 정상에서 화성을 바라보시던 금상(今上:임금)의 미소..

1792_02.jpg[화성행궁. 행궁은 도성 밖에 있는 임금의 임시 궁궐을 말한다. 온양행궁, 남한산성행궁등이 있었다.]

그 아름다운 곳에 제가 쏟아 부었던 땀과 그 많은 불면의 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1792년 겨울 저는 아버님 상중으로 한양을 떠나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 해 추운 어느날 금상께서 저에게 아주 희한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홍문관의 직위를 가지고 있어도 모든 공무는 포기한 채 부모상을 지켜야 하는데, 그런 저에게 말씀 하실 정도니 꽤나 중요한 업무였지요.
갓 30살을 넘긴 저에게 금상은 ‘새로운 도시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허허….새로운 도시를 만들라니요. 그것이 그렇게 쉽게 만들어집니까.
저의 당혹스러운 모습에 금상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이 새로운 도시가 백성들이 안전하게 잘 살수 있는 곳이 되길 바란다. 그것은 예전의 고루한 방식이 아닌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으로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대 가슴에 품어왔던 ‘그것’을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성리학만이 아닌, 실학과 같은 폭넓은 학문을 통해 혁신적인 조선을 꿈꾸었던 저의 속마음을 금상은 알고 계셨고, 또 그 마음을 펼쳐 보라고 하신 겁니다.
네…저에게 기회가 온 것입니다. ‘조부모상을 3년으로 하는 것이 맞는지, 5년으로 하는 것이 맞는지’로 온 나라가 싸우는 이 때, 전 그 기회를 반드시 잡기로 결심했지요.

저는 새로운 도시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안전이라고 생각했고 바로 조선에 가장 적합한 성곽을 계획했습니다. 물론 얼마 전 한강에 배로 다리를 만들어 본 경험은 있었지만, 성곽은 정말 큰 공사 아니겠습니까. 저는 먼저 조선의 성곽을 연구 한 후 조선에서 한번도 만들어 본적이 없는 새로운 성곽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조선성곽의 문제점을 들어 유성룡이 제안한 『성설』, 중국 명나라 때 윤경의 『보약』등의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 한 후, 저만의 방식으로 다시 정리했습니다.
제가 여러 종류의 학문에 대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저만의 ‘크게 분류하기’방식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지요.
먼저 일곱 가지로 성곽 계획의 틀을 잡았습니다. 분류, 재료, 호참(성곽 둘레의 참호), 축기(터쌓기),벌석(돌 다듬기), 치도(도로), 조차(수레제작), 성제(성을 쌓는 법)외에 특히,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이제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거중기와 큰 돌을 손쉽게 운반하는 수레를 만들었지요. 유형거(遊衡車)는 바퀴가 아주 튼튼하고 경사지도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얼마나 잘 만들었냐고 물으셨습니까?
흠….예를 들자면, 이전의 수레 100대로 324일 걸려 운반할 짐을 유형거 70대로 154일만에 운반이 가능합니다.
또한 거중기는 한 사람당 400근(약 240kg)을 들어 올릴 수 있어 공사기간을 빠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요. 금상께서도 이것으로 4만 냥 이상의 비용을 절약했다고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화성의 전체 범위를 정하는 것이 모든 계획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략의 길이를 3,600보(약 4.24km)로 높이를 2장5척(7.75m)로 정했고 거기에 맞춰 석재, 기술자, 인부, 비용을 산출했습니다.

1792_03.jpg[서쪽의 서장대와 장안문을 이어주는 석축]

성곽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석재의 경우 가까운 곳에 석재 채취장을 찾아 운반 비용을 최소화 했고, 석재의 크기를 용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한 수레에 싣는 숫자를 일정하게 했습니다. 그래야 전체 수요량에 맞춰 계산 할 수가 있지요. 물론 이런 방식을 제가 완전히 새로 고안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확한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맞춰 일을 진행하는 것이 불필요한 비용과 시간의 낭비를 막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제가 추구하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이기 때문에 이번 화성에서 그 목적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1792_04.jpg [성문을 보호하는 반원모양의 옹성] 화성 성곽은 예전 우리 조상이 도성을 만든 성곽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예전엔 마을을 둘러 쌓고 있는 성, 즉 도성(都城)이 있었고 전쟁 시에 피난을 가서 몸을 숨기는 산성(山城)이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성을 두 종류로 만들어야 하고 또 관리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화성은 그 두 가지의 성을 합친 ‘방어와 공격이 가능한’ 성곽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전쟁이 나서 화성 바깥으로 도망가지 않아도 우리 백성들을 지킬 수 있도록 말이죠. 화성은 그런 이유로 몇 가지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옹성(甕城)과 현안(懸眼)이 그것입니다.
옹성은 성문 밖에 반원형 등의 형태로 한번 더 쌓은 성을 말합니다.

성문을 보호하는 기능 외에 전면으로 돌출되어 있어 다른 방향에서 성곽을 기어 오르는 적을 차단할 수 있게 했습니다. 중국에서 사용하던 방식인데, 임진왜란 후 유성룡의 제안으로 알려졌으나 조선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은 방식이었습니다. 화성의 네 군데 성문에 모두 옹성을 두어 화재로부터 성문을 보호하도록 했습니다.
현안의 경우 성벽을 일정하게 뚫어 외부의 적을 감시하고 활을 쏘는 용도였으나 저는 조금 변형을 했습니다. 벽의 구멍을 45도 각도로 아래로 뚫어 성벽에 근접한 병사도 동시에 감시하고 뜨거운 물을 끼얹어 적을 물리치도록 했지요.

아..저는 그때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같은 이용후생학자들의 글을 읽으며 현실적인 조선의 개혁을 꿈꾸던 제가 그 꿈을 화성에서 실현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금상이 아니셨다면 그런 저의 꿈들도 그저 ‘기이한 선비의 글장난’으로 끝났을테지요.

화성(華城)…..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제 꿈이자 금상이 꿈꾸시던 이상의 공간입니다.

dasan.jpg

일러스트레이션 : 금민

참고문헌 :
정약용, 『여유당 전서』
『정조실록』
최홍규,『정조의 화성 건설』
최홍규,『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유봉학 외,『정조시대 화성 신도시 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