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출산 소식을 듣고 눈물을 쏟은 지 열 달이 지났다.
연락을 전해 받을 때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다행인지, 아닌 건지. 많은 감정이 섞여 손녀가 생겼다는 실감조차 희미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보고 싶다’ 였다.
나는 핏덩이가 보고 싶었다. 어떻게 생겼고 누굴 닮았는지가 아니라 자궁을 막 탈출한 핏덩이의 본질이 너무 궁금했다.
딸은 금방은 안 된다고 했다. 조리원 방문은 당연히 거절,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산후 도우미의 동선과 겹친다며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 달이었다. 긴 기다림의 한 달을 보내는 사이 대면 욕구는 중구난방 자라 총량을 채운 풍선처럼 터질 지경이 되었다.
드디어, 대면했다. 세상살이를 겨우 한 달 넘긴 생명체, 너무 작은 나머지 얇은 유리로 만들어진 인형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얼마나 조심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신생아와의 초면이 새삼스러웠다. 입에선 낮은 탄성이 터졌지만 그걸로 내가 상상한 감정과 일치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신생아를 들여다볼 때마다 숨을 죽였다. 꿈틀대고 눈을 흘기고 만세를 하고 얇은 다리를 허공에 비비는 행동이 신기했다. 눈을 뜨고 있어도 감고 있어도 모두 다 신비했다.
작은 입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게, 더 작은 똥꼬로 쌀 수 있다는 게, 트림도 하고 방귀도 뀐다는 게 신기했다. 마땅히 할 짓 하는 건 데도 신비감을 일으키는 인간, 간혹 트림과 방귀를 동시에 발산할 땐 우리 모두 개인기를 본 것처럼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별거 아닌 걸 초능력처럼 느끼게 하는 놀라운 인간이 내 손녀로 왔다.
손녀는 매일 분화했다. 분화는 매우 빨랐다. 손녀는 매일 다른 크기로 새로 태어났다. 나는 손녀의 분화에 빠져들었다. 어느 한 가닥이라도 놓치게 될까 봐 조바심이 났다.
세상에 존재하는 분화 중 이렇게 아름다운 분화를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한다. 손녀의 유전자 속에는 나의 일부도 분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손녀에게 빠져드는 건 자기애적 감정인가 아닌가 구분할 순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런 류의 분화가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오래되었고, 그래서 까무룩 흐려졌지만 내 새끼들에게도 이런 분화가 있었다. 어린 엄마는 분화가 아름다운 줄도, 놓친 줄도 모르고 지나쳤다. 아이들이 예뻤다는 생각은 통으로 기억나고 내가 힘들었던 감정은 세세하게 기억난다. 기억 끝에 걸리는 아쉬움이 많다.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반성을 넘어 애도에 이른다. 사랑으로 퉁친 게으름들, 아름다움을 놓친 무지들 그밖에 많은 일들을 반성하고 애도한다.
둘째보다 결혼이 늦은 첫째가 무자식을 선언했다. 부모 의견을 반영하지 않는 세대이니 알았다 하고 기어코 남은 아쉬움을 혼자 조용히 처리했다. 그러던 차에 둘째의 출산 덕분에 인간 분화를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고맙고, 다행이다.
지나간 시간의 반성과 아쉬움이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명분과 손을 잡는다. 명분은 세상에서 가장 큰 돋보기를 손에 쥐여 준다. 돋보기 속에서 딸의 어린 날과 졸린 눈을 참으며 딸을 어르던 내 젊음이 보인다. 피곤에 밀린 순간들을 정렬되지 않는 후회로 남긴 지금의 나는 딸을 대신해 작은 인간, 나의 손녀에게 빠져들 준비를 마쳤다.
다 담으련다.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전부 저장하련다. 밀려오는 소회 달래듯, 마지막 사탕 녹여 먹듯 돋보기를 최대한 가까이 대고 두 눈 크게 뜨고 손녀를 들여다본다. 벅찬 감동과 흐뭇한 미소가 이어달리기하는 순간순간이 어쩔 줄 모르게 달콤하다.
손녀가 내 품에 안겨 분유를 꿀떡 인다. 허공을 젓는 손에 손가락 하나를 쥐여 준다. 꽃잎 같은 작은 손이 내 검지 손가락을 품어 다문다. 나의 일부는 손녀의 품에서 전류를 느낀다. 행복하다.
내려다보고 올려다본 두 시선이 만난다. 손녀의 눈동자는 인형의 그것과 닮았다. 일체의 깜박임도 없는 까만 눈. 순수한 블랙홀이다. 순수하지만 단호한 블랙홀. 나는 단호함을 넘어서지 못한다. 블랙홀이 쏘는 단호함에 기어이 고해성사를 바친다. 그래 맞아 내가 니 할미야.
뫼비우스 띠가 겹치는 지점, 육십간지 순환이 겹치는 지점에서 만난 우리.
환갑을 알아차렸을 때 붕 뜬 느낌이었다. 아줌마라는 호칭에 오래 낯을 가렸다. 어쩔 수 없어 받아들였더니 환갑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줌마보다 더 강한 거부감이 일었지만 이 또한 거부할 수 없는 순환의 일이다.
빼박 할머니란 실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들고 있었던 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정하지 못한 혼란 때문이었다. 기꺼이? 기쁘게? 환갑이라 이름 붙어도 여전히 관계 속에 살아야 하고 상대방에게 보여 질 이미지가 고민되는 현실이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할머니란 게 정말 기쁜지, 기쁜 척은 아닌지 헷갈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한 달짜리가 쏘아보며 물었던 거다. 그래서 내가 싫어요? 속마음을 간파당한 기분이 들었다. 퍼뜩 정신이 들었고 지체 없이 고해성사를 했다. 할미가 잘못 했어. 항복이야.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할미는 무조건 니편이야. 손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보니 손녀는 눈 한 번 깜박임도 없이 분유 150ml를 단숨에 해치우는 초인에다 내 맘을 꿰뚫는 신이었다. 신 앞에 어찌 반기를 들 수 있으리.
움츠렸던 가슴과 쥐었던 주먹을 펴는 것, 항복은 그런 거다. 품고 있을 때는 무겁지만 인정하고 나면 가벼워진다.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이 샘솟는다. 항복 덕이다. 이제 내 사랑을 얼마든지 받아 줄 대상이 생겼다. 얼마 만의 행복인가. 처음과 끝을 맞대고 있는 우리의 품은 무한대가 될 것이다. 육십 간지의 필연.
민들레 홀씨처럼, 내 딸의 자궁에 자리 잡고 태어난 손녀는 내 마음에도 민들레 홀씨가 돼 주었다.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세상을 노닐다 가장 정한 땅에 앉아 뿌리내리고 싹 틔운 홀씨처럼 내 팬심에 홀씨가 된 손녀다. 정갈한 줄기를 올리고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내는 홀씨의 힘찬 여정을 나는 때로 묵묵히 때론 적극적으로 변함없이 응원하고 지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