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y? 日常史 취향 개발 프로젝트

팬심.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응원하는 마음. 내가 빠져 본 적 없는 영역이다.   

레이프가렛

고등학교 때 레이프 가렛을 좋아한 친구가 있었다. 구겨진 교복에 떡진 머리, 공부를 잘했다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 외에는 그 친구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조용한 성향이었고 나와 친하지도 않아, 개인적인 관심사를 비롯해 그 친구 전반에 대해 호불호가 없었다. 졸업한 지 20여 년이 지날 무렵 동창 모임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그날 그 친구는 내게 뜻밖의 고백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게 상처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 친구는 내 앞자리였다. 1980년 레이프 가렛이 방한했을 때 교실은 술렁였다. 팝송을 즐기지 않던 나는 술렁임에 섞이지 않았다. 다만 앞자리 친구의 흥분을 보니 묘한 흥미가 일었다. 평소 말 한마디 없다가 레이프 가렛에게 열을 올리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친구의 고백으로 레이프 가렛의 매력을 모르겠다며 시큰둥한 딴지를 걸던 기억이 떠올랐다. 순간 친구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레이저, 그 퍼런 서슬로 내 몸이 강타당했던 것도.

친구의 고백 덕분에 깨어난 추억이었다. 팝가수는 물론 팬심 자체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별 뜻을 담지 않았던 거다. 실수라면 친구가 흥분 중이라는 사실을 놓친 거였다. 그래서 눈치 빠르게 꼬리 내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상처였다니.

팬심으로 인한 첫 번째 에피소드다. 그 일은 이내 기억에서 산화되었다. 그러다 새삼스러운 고백을 들은 거고, 친구의 기억에 기반해 바로 사과했다.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했다고. 기억에 오래 머물지 않고 잊힌 것. 내게 팬심에 대한 관점은 그런 것이어서 사과 또한 금방 잊었다. 

정동원

다시 세월이 흘러 타인의 팬심으로 인한 에피소드가 또 발생했다. 이번엔 친언니였다. 바야흐로 트로트 열풍이 불었고 언니도 그 바람에 올라탔다. 언니는 정동원에게 완전히 미쳤다. 처음엔 그저 어리고 딱하며 기특한 생명체라는 명분이 이유였다. 손주 바라보듯 애정 그득한 전지적 할머니 시점이던 팬심이 광기로 변해 가는 게 보였다.

언니와 동행하는 차 안은 언제나 정동원 노래가 울려 퍼졌다. 동승자의 이해 따윈 구하지 않았다. 멋대로 볼륨을 키우고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나아가 자신의 팬심에 올라탈 것을 강요했다. 나는 그런 무례가 싫었다. 돌려 말해도 노골적으로 표 내도 아랑곳하지 않는 독선. 동조하지 않는다고 삐지더니 급기야 카톡을 차단하는 적반하장의 지경에 도달했다. 언니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동화되기는커녕 종교가 돼 버린 팬심에 반감만 생겼다.

시간이 지나 서로의 서운함도 스르르 풀리고 품었던 반감도 무심으로 바뀌었다. 그즈음 팬심을 받아들이고 동조해야만 하는 계기가 생긴 터였다.

드라마 촬영

나는 커피를 만들고 파는 가게를 운영한다. 가끔 드라마 촬영 대관 의뢰를 받기도 하는데, 그 덕분에 유명 연예인을 근접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곤 한다. 팬심에 무심하니 연예인 실물을 봤다고 무심이 유심으로 전환되지는 않더라.

드라마 속에서 내 가게는 주인공들의 만남의 장소라 매회 노출되었다. 거대 팬덤을 지닌 배우들이 여러 명 출연했고 드라마는 흥행에 성공했다. 나는 의무감으로 시청한 탓인지 그다지 재미있게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치는 대사가 흥미로워서 엄청 재미있었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게다가 넷플릭스에서 동시 방영하는 바람에 흥행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코로나 시국에 찍고 방영된 드라마라 본방 중에는 내 가게를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간간이 찾아준 팬들의 행동 패턴을 관찰할 수 있었다.

팬심을 품은 배우가 드라마에서 사용한 컵에 커피를 달라든지, 그가 앉았던 자리를 돋보이게 하려고 꽃을 사 온다든지, 또는 좋아하는 배우가 앉았던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시간을 보내며 무언가를 쓰고 기록하는 모습까지. 이렇게까지 정성스러울까 싶은 마음으로 바라본 풍경이다.

그 이후로도 같은 풍경은 한참이나 연속되었다. 가게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 사람들. 가족 단위이거나 친구와 함께이거나, 때로 혼자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한참을 머물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팬심으로 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개 어눌한 한국말로 메뉴를 주문한다. 처음엔 한국을 찾은 관광객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몇 마디 나눠보면 하나같이 드라마를 보고 찾아온 이들이었다.

일본, 중국, 홍콩, 멀리 캐나다에서까지 오직 팬심 하나로 비행기를 탄 사람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팬심의 힘이 과연 뭘까 하고.

마음 둘 곳을 정하고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 팬심의 정체라면, 나의 팬심은 요즘 손녀에게 달려가고 있다.

이것이 내가 팬심에 대해 관점을 바꾼 계기다. 관점을 바꿔 생각하니 내가 팬심을 오해한 듯싶다.

나 또한 팬심 없이 산 적이 있었던가. 태어나서는 부모에게, 자라면서는 친구에게, 이성과 배우자에게 마음을 쏟고 덜어내면서 살아가는 힘의 동력으로 삼았으면서 그게 팬심이라는 사실을 배제했었다.

대상이 내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식물에게, 자연에게, 물건에 곁눈질하고 밀당도 해가며 원심력을 키웠으면서. 돌이켜보면 그 마음도 팬심의 일부인데 팬심을 사람, 특히 연예인으로 국한 지은 건 편협한 정의였던 거다.

마음 둘 곳을 정하고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 팬심의 정체라면, 나의 팬심은 요즘 손녀에게 달려가고 있다.

팬심 Fanship
집단적·사회적 세력을 뜻하는 '팬덤(Fandom)'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개인이 특정 대상에게 품는 개별적이고 내면적인 심리적 애착과 몰입의 정도를 뜻함

집단적인 열광과 달리, 개인이 특정 대상에게 스스로 원해서 깊이 빠져드는 주체적인 감정 상태를 뜻함. 이는 일상에서 느끼는 외로움이나 서운함, 혹은 관계에서 오는 갈등으로부터 나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내면에 스스로 만드는 가장 안전한 정서적 은신처로 작동합니다.

뮤즈 Muse
그리스 신화에서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아홉 여신에서 유래한 말로, 현대 대중문화 및 예술 영역에서는 '작가나 예술가에게 영감과 창작의 동기를 부여하는 대상 또는 존재'를 총칭

평소에는 아무런 감정이나 관심이 없던 평범한 대상을 내 일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의미 있는 존재로 단숨에 바꾸어놓는 정서적 계기이자 자극을 뜻합니다. 꼭 거창한 연예인이나 예술 작품이 아니더라도, 무심히 흘러가던 내 하루에 깊은 애정과 몰입을 불러일으켜 내 삶을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최초의 시작점이자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자기 확장 Self-Expansion
인간이 동경하거나 가치를 부여한 대상의 자원, 정체성, 관점을 자신의 자아 체계 내부로 흡수하여 자신의 한계를 넓히고 심리적 에너지를 얻으려는 동기 기제

내가 좋아하는 대상의 긍정적인 힘과 매력을 내 내면으로 받아들여 자아를 채우고 삶의 활력을 키워나가는 과정. 인간은 생애 주기에 따라 부모에서 친구로, 다시 배우자나 연예인, 그리고 '손녀'에 이르기까지 애정의 대상을 능동적으로 넓혀가며, 이러한 몰입을 통해 일상을 버텨낼 정서적 에너지를 스스로 공급하는 보편적인 생존 전략이 됩니다.

질문들

보답 없는 대상에 마음을 쏟는 행위는 정서적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더 큰 힘을 만들어내는 일일까?

즉각적인 반응이나 보답이 없는 대상에게 몰입하는 것은 나를 지치게 만드는 정서적 낭비에 가깝습니다. 기대한 만큼 피드백이 없을 때 인간의 뇌는 피로감을 느끼며, 결과적으로 일상을 버텨내야 할 소중한 심리적 자원을 일방적으로 소모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대상을 향해 조건 없이 정성을 다하는 것은 내 마음을 일방적으로 잃기만 하는 소모성 활동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존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과정 그 자체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는 힘을 얻게 되며, 결국 단조로운 일상을 버텨내고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더 큰 에너지를 역으로 생산해 내는 순환 과정입니다.

사실들

데이터 / 통계

'팬심(덕질)'을 경험한 대중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팬심을 표현한 후 느끼는 감정으로 "즐겁다"는 응답이 60%로 가장 높았고 "만족스럽다(50%)", "행복하다(40%)", "뿌듯하다(30%)" 순으로 나타났으며, 10명 중 2명은 성취감과 소속감을 얻는다고 답했습니다.

전문가 의견 / 비평

심리학에서는 집단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뜻하는 '팬덤'과 구별하여, 개인의 내면적이고 개별적인 심리적 애착 정도를 '팬십(Fanship)'이라 정의합니다. 팬십은 타인과의 관계보다는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 작동하며, 개인이 대상에게서 느끼는 친밀감과 정서적 몰입의 정도를 의미합니다.

전문가 의견 / 비평

특정 대상에 몰입하는 행위가 스트레스 상황에서 심리적 안전 기지 역할을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팬심은 뇌의 보상 회로를 자극하여 도파민 분비를 활성화하며, 이는 일상의 지루함이나 고통을 견디게 하는 '심리적 방어벽'을 구축합니다. 특히 노년층에게 팬심은 고립감을 해소하고 생의 의지를 북돋는 핵심 기제로 작용합니다.

데이터 / 통계

프로야구(KBO) 팬들을 대상으로 한 2025년 조사에서, 자신을 '진심인 팬'으로 규정한 응답자의 77.7%가 팬 활동을 통한 삶의 만족을 표했습니다. 특히 60대 이상(95.5%)과 40대(83.2%)에서 팬심의 강도가 매우 높게 나타났는데, 이는 나이가 들수록 팬심이 일상의 단조로움을 깨고 생의 활력을 유지하는 '적극적인 삶의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전문가 의견 / 비평

심리학자 데릭 라판(Derek A. Laffan)의 연구에 따르면, 특정 대상에 대한 개인적 애착인 '팬심(Fanship)'은 행복, 자아존중감, 사회적 연결성을 예측하는 핵심 지표로 나타남. 특히 집단 활동인 '팬덤'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개별적인 '팬심' 수치가 높은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이 유의미하게 상승한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한마디

인생의 단계마다 마음을 쏟는 대상은 달라지더라도, 그 몰입을 통해 내면을 안전하게 지키고 나를 채워나갈 팬심이 늘 필요해요.

개인화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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